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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imout님의 서재
  • 묵묵
  • 고병권
  • 10,800원 (10%600)
  • 2018-12-05
  • : 1,644
오후 3시, 보통의 날들이었다면 부랴부랴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뭔가를 반복하는 말을 하거나 간단한 형성 평가 등을 보았겠지. 오늘같이 뒤숭숭한 날은 '그래도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기 딱 좋다. 게다가 요즘 읽는 책들이 돈 벌고 그 돈으로 두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일군다며 마음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감정들을 일깨우는 책들이다. 이라영이 쓴 <말을 부수는 말>, 고병권 에세이 <묵묵>(돌배개, 초판 7쇄), <느티나무 수호대>(김중미 씀, 돌베개, 2023) 3권이 전부 그러하다. 이 세 권을 연달아 읽는 동안 나를 돌이키게 했던 것이 있다. '나는 타자를 보는 시선이 납작하다'라는 깨달음이다. 여성 차별과 비정규직 차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 당사자의 입장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

고병권 선생님은 니체 이론 전문가이다. '수유 너머'라는 대안 연구 공간에서 일을 하셨는데 언젠가부터 그곳에서 나오는 연구서나 연구가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먹고 사느라 내가 관심이 없었나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해체 위기를 겪고 연구자들이 각자 다른 공간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수유 너머에서 주도적인 연구자 역할을 하셨던 고병권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다. 장애인의 검정고시 학습을 도우며 이동권 등 장애인 기본권 향상에 힘을 쏟는 '노들 야학'의 철학 선생님으로 일을 하셨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묵묵>이라는 에세이로 나온 것. <느티나무 수호대>라는 작품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 선생님의 작품이다. '다문화'로 통칭해서 부르는 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대포읍'이라는 곳에서 부대껴 살며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두 권의 책은 이라영의 <말을 부수는 말>을 읽으면서도 내가 깨지 못했던 '나의 억울함만 살피기'의 관점을 반성해 보라고 가만 가만 나를 흔들어 주었다.

장애인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하면 내게는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으로 일상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불우한 사람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라고 하면 '부모의 나라에서도 태어난 나라에서도 어엿한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이다. 표정이 어둡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나약한 모습을 한 스테레오 타입의 사진이다. 이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폭력적인지를 알려주는 두 작품을 만난 것이다. 고병권 선생님께서 <묵묵>에 쓰신 글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자선가의 무례'라는 장이었다. 이 장에서 자선가의 무례를 니체의 입을 빌려 설명한다. '자선가는 도움을 줄 대상을 먼저 상상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위치에 놓아 본다.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는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릴 것 같다. 이런 상상을 마친 그는 가난한 이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의 상상대로라면 상대방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야 한다.(중략) 그런데 이게 구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선가는 끔찍한 배우를 만난 감독처럼 분노한다.'(77쪽)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그 욕구는 자립할 때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온정주의적 시각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노들 야학에서 국어 수업을 한다고 생각해 본다. 시간을 내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면서 검정고시에 도움이 되는,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전수'했는데 '고맙다'는 말이나 '당신 덕분에'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매우 서운하고 은혜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사랑과 헌신으로 장애인의 품행에 대한 명령권을 믿는 (78쪽) 습관은 여전한 것이다.

<느티나무 수호대>에 나오는 예쁜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느티 샘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고 오해와 끔찍한 싸움이 난무하는 활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느티 샘은 마을을 품고 있는 당산나무가 인간화된 존재로, 애초에 내가 품는 인간적 감정을 훨씬 초월하고 있는 인물이어서 다행이다. 매일 아침 갓 구운 빵과 잘 깎은 사과를 내주고, 넓은 방과 읽을 책을 계속 제공해 주는 데도 고맙다는 말 없이 훌쩍 나가거나 '더 맛있는 빵 없냐'고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을 본다면 나는 쫓아낼 게 뻔하다. 남편의 집에서 적응하지 못해 집을 나간 엄마를 둔 동호,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혐오의 말로 마음이 찢긴 금란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 와 한동안 '동남아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민호...전부 사회의 편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못해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어른들 역시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한국인이 꺼려하는 일을 하거나 한국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 그들을 느티나무에서 환대하며 먹을 것을 내오고 함께 모이도록 하는 존재가 느티 쌤이다. 화 내지 않고 온유하며 자신의 존재가 지워질 위기에 처해도 의연한 초 인간적 존재. 아이들은 느티 샘 곁에서 사람들을 만나 따뜻하게 어울리는 경험을 하며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그리고 느티 샘의 존재가 지워질 수 있는 재개발의 위협 앞에서 자기들이 잘 할 수 있는 춤과 브이로그로 그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두 작품에서 '한국인의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야 하는 존재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생동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강의하는 동안 "이거 골 때리네!"라며 감동을 표현한 사람, 고병권 님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자신의 몸으로 끝까지 단어를 완성한 사람,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광화문에서 4년간 농성하며 죽은 자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자기는 몸치라며 웅크리고 울고 있는 대신 BTS의 노래를 부르며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아이가 있다. 먹고 사느라 자기에게 동생 돌봄을 다 맡겨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마냥 착한 아이가 되지 않고 기어이 자신이 힘들다고, 어른은 자기에게만 이해해달라고 한다고 소리 지를 줄 아는 아이도 있다. 금메달씩이나 따야 학교 대표로 인정한다는 어리석은 어른들을 보면서도 씩씩하게 태권도를 하기도 한다. 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자기가 삶의 주권자임을 깨달은 데에서 온다. 그 깨달음은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에게 지기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연대성에서 온다. <느티나무 수호대>에는 이런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대신 이런 말들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대포읍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책으로 읽은 말만 기억했다가 한국 사회의 정상성 범주에서 무엇이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대뜸 연민부터 하고 보는 게으른 나를 일깨운다.

이 사회에서 진실의 빈 자리는 너무도 크다. 내가 또 알지 못하는 많은 곳이 빈 자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제 메타포라 수업이 생각난다.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몸으로 부딪힌 경험만이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의 빈 자리가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왜 빈 자리가 계속 생기는지, 왜 이 사회는 계속 그 소리를 은폐하는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고병권 선생님의 말대로 '자선가의 무례'를 저지를 수 있다. 내가 배운 것으로 도움을 주겠다는데, 내가 원하는 예쁜 모습을 하고 있지 앖다고 충분히 불쌍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은이와 완이부터 내가 그렇게 대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를 약자로 본 것은 아닌지, 아이한테 인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묵묵>, 80쪽) 매 순간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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