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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의 연구
- 앨 앨버레즈
- 16,200원 (10%↓
900) - 2025-03-05
: 23,845
내가 한 사람을 죽였다면 나는 두 사람을 죽인 것.
흡혈귀는 자기가 당신이라고 말하고
나의 피를 일 년 동안 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칠 년 동안, 아빠,
당신은 이제 드러누워 계세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어요.
실비아 플라스, 「아빠」
앨 앨버레즈는 『자살의 연구(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를 통해 자살이라는 주제를 문학적, 철학적, 심리적, 그리고 개인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이 책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를 넘어, 자살에 대한 문화적 서사와 개인적 경험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강렬한 성찰로 이끈다. 특히,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중심으로 서문을 구성하면서, 자살이 단순한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문학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앨버레즈는 자살이 문학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를 분석하며, 셰익스피어, 괴테, 도스토옙스키, 카뮈 등의 작품에서 자살이 철학적·미학적 주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 문학에서 자살이 종종 비극적 운명의 귀결로 서사화되었으며, 특히 낭만주의적 사조와 결합하면서 신화적 의미를 획득했음을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살이 단순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시대적·문화적 변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책의 중요한 한 축은 실비아 플라스와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회고다. 앨버레즈는 플라스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그녀의 정신적 고통과 창작의 긴장 사이에서 자살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탐색한다. 그는 플라스의 작품과 삶을 병렬적으로 분석하며, 그녀의 자살이 단순한 심리적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적 정체성과 깊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학문적 객관성과 개인적 애도의 경계를 오가며 더욱 몰입도를 높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출산한 후, 산후 우울증을 겪었다. 정서적 어려움 이전에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는데,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할 일들로 채워지는 일상은 나를 소진하게만 했다. 일방적인 돌봄의 과정에서 나는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역할을 나의 또 다른 자아로 성숙하게 수용하기 보다, 그에 완전히 잠식당해버렸다. 이런 감정 속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읽는 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체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각자의 결론은 달랐다.
앨버레즈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뇌에 대하여 특히 4장 ‘자살과 문학’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이 장에서 앨버레즈는 자살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어떠한 철학적, 미학적 기능을 해왔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존 던에 대한 예시가 인상적이었다. 존 던은 ‘비아타나토스’에서 당시 금기시되던 자살에 대한 신학적·도덕적 재해석을 시도하는데, 자살이 무조건 죄악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는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존 던은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하는 일은 하나의 행위에 해당하지만, 어떤 전체로부터, 어떤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는 애초에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공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며 존 던은 잉여의 존재로서의 소외를 사유한다. 그리고 존 던은 유명한 구절, "그 누구도 섬이 될 수는 없다(No man is an island)"라는 말을 남겼다. 존 던을 통해 앨버레즈는 자살이 단순한 절망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필연적 질문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앨버레즈는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통해서 자살의 윤리적 문제를 짚기도 한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자살을 낭만적 열정의 표현으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앨버레즈는 이 소설이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감정적 고양과 실존적 고립이 결합된 낭만주의적 자살 서사의 원형임을 지적한다. 베르터의 자살은 비극적 결말이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이 작품은 유럽 전역에서 ‘베르터 효과(Werther Effect)’라는 사회적 현상을 일으키며, 문학이 자살을 어떻게 신화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앨버레즈는 이렇게 문학이 자살을 숭고한 행위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책의 원제에 나오는 ‘The Savage God’은 W. B. 예이츠(W. B. Yeats)가 비평가 아서 크롬튼 릭스(Arthur Crompton Rick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용한 표현이다. 예이츠는 낭만주의적 열정을 신격화했던 19세기의 시인들과 비교하며, 현대 예술가들이 ‘야만적인 신(savage god)’을 섬긴다고 표현했다. 알바레즈는 이 표현을 빌려, 자살이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예술과 철학의 중심 주제로 소환되는 역설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자살은 문학과 예술에서 신화화될 때는 숭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통과 혼란, 그리고 비극을 남긴다. 한편 알바레즈가 말하는 ‘야만적인 신(savage god)’은, 어쩌면 우리를 집어삼키는 사회적 역할과 기대의 무게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초반에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알바레즈가 문화적 세련됨과 자살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살이 종종 고도의 지적·예술적 감수성과 연결되며, 사회적으로 교양 있고 창의적인 계층에서 자살률이 더 높게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학과 예술 속 자살 서사가 주로 엘리트 지식인들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자살이 단순한 심리적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앨 앨버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사유를 시적 산문으로 전개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명징한 답을 찾기 보다 삶의 난제들과 그저 마주하기를 제안하는 듯 하다. 시가 모호한 언어와 운율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듯, 삶 또한 그와 닮아 있는게 아닐까?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부정할 수 없듯, 삶도 마찬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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