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들- 어머니와 아버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하얀 후광 속에 온전히 차분하게 잠겨 있는 외외증조할머니- 이 모두 내 주위에 모여 있다. 너무 일찍, 작고 허약하게 태어난 나는 모든 사진 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사진 속에서 내 주위에 모여 머리를 기울인 채 내 입술이 또 다시 파래지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너무도 얕게 숨을 쉬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너무 작고 항상 추위를 탄다. 하지만 친족들은 마치 태양인 양 나를 보고 있다. 내 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외외증조할머니, 그분들 모두가 나를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분들은 내가 태양인 양, 그분들이 그때껏 평생 추위를 탓던 양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태양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행성이 아니다.
그분들은 우주다.
31쪽. 당신들이 나를 바라보던 방식
✏️ 얼마전 누군가가 자신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자신을 비롯한 형제자매와 사촌들이 모두, 그 외할머니가 각자 자기 자신, ‘본인’을 가장 좋아했다고 기억해서 놀랐다는 글을 보았다. 보통 “너는 우리들 중 좀 더 특별했지”, 라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그런 공평한 사랑이 가능하게 한 그분의 외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까 싶다. 나같은 경우에는 다른 친척들은 잘 모르겠지만, 외할머니와 고모의 '최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그분들과 깊고 친밀하게 교감한 기억이 부모님과의 애착 보다도 더 나에게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어렵고 좌절할 때마다 항상 나의 자존감을 끌어 올려 주는. 나에게 그런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거나 우월감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다는 감각은 외로움과 불안을 잠재워 준다. 그리고 그것이 삶에 주어진 과업들을 견뎌내게 해준다. 황당한, 일어나서는 안될 것 같은, 수치스러운 일 등을 겪는 사람들은 "내가 뭐라고", 혹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로 그 일들을 겪어 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마거릿 렌클의 글처럼 나를 태양처럼 바라보지만, 사실은 결국 나라는 생명체를 있게 한, 태고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온 우주 같은 존재들이 보내오는,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신호들을 포착하며 어려운 일들을 결국 받아들이고, 나의 생을 이어간다.
1973년, 버밍햄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요." 별 다를 것 없는 화요일 오후, 부모님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어머니는 맨발이다. 아버지가 작업화를 신었지만, 어머니의 발가락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 댄스 스텝은 그들 자신의 심장박동만큼이나 익숙하다. 이 노래 가사만큼이나 익숙하다.
나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뭔가에 당황한 채 복도에 서서 지켜본다. 아버지의 팔이 어머니의 허리에 둘려 있다. 어머니는 발끝으로 서 있다. 어머니의 팔이 아버지의 어깨에 얹히고 머리는 아버지의 광대뼈 밑에 기대어 있다. 그들의 다른 쪽 손이 서로 얽혀 그들의 심장 사이에서 마주 잡고 있다. 그들의 스텝은 너무나 잘 훈련되어 있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이 회전할 때 그들 사이에는 단 1센티미터의 빈 공간도 없다.
110쪽.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 어린 시절의 기억, 부모님들과 함께한 기억은 잠깐씩 섬광처럼 스쳐간다. 하지만 그것은 날카롭거나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섬광의 끝자락 처럼, 온화한 공기와 은은한 노란빛으로 감싸져 있다. 안개 필터를 낀 듯한 아련함이 깃든. 그 기억속 풍경은 느리게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말이 없고 관찰자처럼 앉아 있다. 나는 그들을 지켜 본다. 그들은 내가 없는 듯, 내가 앞에 있어도 사랑하거나 싸우는데 몰두한다. 꿈에 들어간 것처럼 화면이 펼쳐지면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 나는 그들이 나의 엄마, 아빠인 것 외에는 그들을 잘 모르고, 그들이 나의 엄마, 아빠라는 것이 너무나 낯설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꿈속처럼 나의 발은 무겁고 그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순간을 공유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같은 순간에 대한 다른 기억들은 실재했음을 비현실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나는 그동안 내가 관찰한 엄마,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문득 문득 나의 머리와 가슴을 찌르는 그 풍경들을 떠올리면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가 그 시간속에 존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가 얽혀 있었고, 하나 하나 알아가고 싶은, 그 우리의 너무 많은 우리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우리는 함께 거기에 있었다.
내 꿈속에 나올 때 엄마는 저승의 유령 혹은 나 자신이 느끼는 비통함을 반영하는 표정이 아니라, 항상 가슴아파하는 모습이다. 꿈에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첫 반응은 항상 안도감이다. 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착각했어요.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꿈속에서 내가 엄마를 붙잡고 꼭 껴안으며 몇 번이고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항상 놀라고 어리둥절해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고인들은 자기들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떤 꿈에서 어머니는 우리 집 현관문 옆 옷장 안에서 자신의 옷걸이를 발견하고 짜증을 냈다. "왜 내 훌륭한 나무 옷걸이들을 전부 가져갔니?" 엄마가 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엄만 돌아가셨어요."
"오." 엄마가 말했다. "그럼 됐다."
250-252쪽. 꿈속에서 어머니가 내게 돌아왔을 때
✏️ "엄마가 왔네요. 엄마가 돌아왔어요.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나말고도 또 있었다니.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꿈으로라도 실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걸까. 실제로 나도 그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꿈속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전화로 아빠가 사실은 살아 있다는걸 연락을 받게 된 후, "하느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또한 아빠가 사실은 돌아가셨음을 꿈속의 모두가 알면서도 사후세계에서 돌아온 아빠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꿈마저 꾸었다. 한편 공교롭게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은 나의 생일날, 아빠는 또 꿈에 나왔다. 꿈 속에서 아빠는 내 생일 선물을 꼭 사줘야 한다며 한참 여기저기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는 초조했고, 나는 그 동행이 그저 너무 즐거웠는데, 그날 나는 결국 체크무늬 미니 스커트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그날 잠에서 깨자마자 엄마한테, "엄마, 아빠가 내 생일 선물 주고 갔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꿈속에서 아빠를 그저 반겼을 뿐, "아빤 돌아가셨어요."란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이 순간의 행복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고, 죽은자와 교감하는 것이 망상이라고 할 지언정, 사랑했지만,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내는 신비한 신호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망자들은 꿈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꿈 속에서 그들은 항상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닿을 수 없듯이 그들도 우리에게 닿을 수 없으므로. 하지만 가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애를 쓰는 것 같기는 하다.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들은 기적적으로 결국 무언가를 이루어 내므로.
안경 없이도 잘 보는 내 예쁜 조카는 오솔길 아래쪽 옷솔버섯으로 뒤덮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조카가 나무의 움푹 들어간 곳에 거의 숨겨져 있는 무당벌레 한 마리를 가리켰다. "콜로라도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무당벌레 한 떼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 곳에 모이는 그 무당벌레 무리를 부르는 명칭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구글을 검색해 봤죠." 조카가 말했다. "그런데 그 명칭이 '사랑스러움(loveliness)이더라고요."
149-152쪽. 보기
애벌레가 약간 움직이고, 마침내 나는 깨닫는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웃자란 피부를 찢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 기어서 달아나는, 삶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휴지 상태일 뿐임을.
그것은 새로운 생물이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시작하기 전에 다시 시작한다.
✏️ 마거릿 렌클은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에서 자연의 순환과 생의 주기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더불어 대를 이어서 연결되는 대가족 구성원들의 서사는,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자연이나 이전 세대와 분리된,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때로는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때로는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돌보는 그녀의 시선은 살아 있음의 경이를 전할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죽음과 상실이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에 가져오는 의미들을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게 해준다. 덕분에 그녀의 글이 나를 돌보는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나는 이제 세상에 뿌려진 사랑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함을, 이 초록색의 세계에서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음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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