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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컴플렉스님의 서재
  • 꿈의 연극
  •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 12,600원 (10%700)
  • 2023-12-05
  • : 721
미스 줄리 : ”떠날 수 없어! 머물수도 없어! 날 좀 도와줘! 너무 피곤해, 정말 끔찍하게 피곤해! 나한테 명령을 내려! 아무 생각도 못 하겠고 행동할 수도 없어. 내가 움직일 수 있게 해줘!“


어젯밤, 선명한 주황색 달이 떴다. 나는 달이 뜬 걸 의식하지 못했는데, 친구가 지금 하늘 좀 보라며 알려 주었다. 친구와 송년회 겸 친구의 생일 파티 겸, 와인을 마시러 나가던 길에 만난, 딱 그 무드에 어울리는 달이었다. 달의 색깔과 닮은 오렌지 와인을 마실까, 잠시 생각했다. 친구와 만나기 전에 나는 밥과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내어 놓고, 아이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었다. 내가 '놀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왠지 모르게 눈치-괜히 내가 의식하는 사회적 압력-가 보이면서, 아무튼 대단한 건 하지 않아도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읽은 희곡, <미스 줄리>는 스웨덴의 미드 솜마-하지절이 배경이다.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북유럽 지역에서는 연인을 찾거나, 에로틱한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축제를 벌인다. 주인공 미스 줄리는 이 하지절에 흥분된 상태로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며, 무척 대담한 일을 벌인다. 계급을 뛰어 넘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구한다. <미스 줄리>의 배경과는 반대로 나와 친구는 밤이 가장 긴 날, 동지에 동네 단골 카페 파티에 참석하여 술을 마셨고, 동지가 갓 지나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중인 어제도 또 술을 마셨다. 하지절이 아닌, 동지를 전후하여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의식을 치른 것이다. 평소의 나의 주량은 와인 반병이라 보통 친구와 둘이 마시면 한병으로 충분한데, 주황색 달이 뜬 밤에 우리는 와인을 두병이나 마셨다. 다섯시간 넘게 쉬지않고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술의 힘. 미스 줄리 처럼 ‘포도주’의 힘을 빌어 나는 안해본 일, 어쩌면 후회할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술의 힘을 빌어서 낸 용기, 용기라기엔 부끄러운 충동에 가까운 일이다. 술이 점점 나를 이기기 시작하는 중이라 요즘 술이 깬 후, 아침에 곱씹을 일이 많아지는데, 한편 그 충동의 결과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다. 설사 누군가에게는 조금 갸우뚱 한 일일지라도, 나는 더이상 지나친 자기 검열을 하고 싶지 않다. 무결함을 나에게도, 남에게도 기대하고 싶지 않다. 어제 슬픈 뉴스를 보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삶의 리듬을 만들어 가는 중에 리듬이 박자가 어긋날 수도, 잠시 멈출 수도 있는게 아닌가 싶은데. 나는 무언가 에로틱한 긴장감을 주던 주황색 달을 떠올리며, 달처럼 둥근 술잔 속 깊은 붉은색 와인을 바라보며, 문득 '미스 줄리'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계급이 다른 사람에게 갑자기 고백을 하며 사랑을 나누려던 그녀의 충동, 아버지라는 권위의 억압으로 인한 혼란과 분노, 하지만 스스로 도망갈 용기가 없어 누군가 명령을 내려주길 바라는 취약함. 그녀의 '급발진'들이 뜬금없고, 당황스러웠지만 하지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자기 마음의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것도 어쩐지 부러웠다. 나도 밤의 거리의 어느 장소에서 술을 마시며 '마음을 풀어헤쳐' 버렸지만, 다음날 찜찜함에 하루종일 기분이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더욱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유롭게, 미스 줄리의 광기에 휩싸여 나도 함께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인, 정체 불명의 불편함에서 홀홀 벗어나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 구분 없이 '자연아'로 키워진 미스 줄리의 정체성은 어쩌면 제3의성, 혹은 퀴어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원하지만, 결혼이나 남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 아버지라는 권위에 억눌린 감정을 느끼는 것, 등은 그녀가 전형적인 그 시대 관습에 따르는 여성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가 아버지에 저항하고자 하지만, '외출했던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날카로운 종소리'에 불안해함과 그녀가 마음을 연 남자가 결국 그녀와 도망가지 않고, 사회적 계급에 다시 복종하는 모습은 서로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다가가던 두 남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미스 줄리가 마지막에 한 선택은 정말 죽음일까, 이전의 구속된 자아를 죽이고 다시 태어남일까. 입센의 희곡 <헤다 가블레르>의 헤다도 미스 줄리와 비슷한 캐릭터이다. 19세기 말, 비슷한 시기에 북유럽에서 이런 여성 캐릭터들이 나온 것은 참 공교로우면서 반갑다. 두 이야기 모두 비극적으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나도 아직 제대로 내지 못하는 목소리를. 특히 <헤다 가블레르>에서 집을 나와 헤다의 집을 찾은 헤다의 동창 엘브스테드 부인의 목소리가 반갑다.


엘브스테드 부인 : 글쎄, 간단히 하자. 남편은 내가 여기 온 거 전혀 몰라.
헤다 : 세상에! 네 남편이 몰라?
엘브스테드 부인: 당연히 몰라. 집에 없었거든. 여행 중이었어. 오, 난 그냥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 헤다! 정말이야! 거기서 너무나 끔찍하게 외로웠거든.
헤다: 그래? 그래서?
엘브스테드 부인 : 내 물건을 몇 가지 쌌어. 꼭 필요한 것 말이야. 몰래. 그리곤 집에서 빠져나왔어.
헤다 : 그냥 그렇게?
엘브스테드 부인 : 응. 그리고선 기차를 타고 이리로 왔어.
헤다 : 세상에, 사랑하는 테아. - 너 정말 용감무쌍이다!
엘브스테드 부인 : 그래,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난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아.
수군대라면 대라지. (우울해지고 피곤하여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야.
헨리크 입센, <헤다 가블레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 그녀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자립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로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것이 그저 자살을 가장한 '사회적 타살'이 아닌, 이전의 자신에서 벗어나는 암시라면 얼마나 좋을까. '광기'로 나타나는 그녀들의 말과 행위들은 사실 위축됨과 취약함의 절박한 표현이다. 타협할 여지가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압력들 때문에 결국 폭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이 보여준 이 극단적 의지가 어쩌면 내면의 언어의 응축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독자적인 심리적 공간을 주장하자/ 사회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롭자/ 폭력과 고루함을 극복하자/ 독립적이고 소망에 따라 행동하자/
관습에 저항하자/ 자기 존중감을 견지하자/ 두려움을 억누르자/ 약점을 극복하자/ 자유롭자
사라 케인 <4.48 사이코시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말하자면 부조리 속에 있다. 자살은 부조리에 대항한 최후의 수단으로 보였다.
싸움의 무용성을 깨달은 순간에도, 절망적이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싸운 맥베스의 행위도 넓은 의미로는 자살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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