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위대한컴플렉스님의 서재
  • 목구멍 속의 유령
  • 데리언 니 그리파
  • 15,300원 (10%850)
  • 2023-08-25
  • : 2,318



데리언 니 그리파는 <목구멍 속의 유령>에서 자기 자신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동시에 200년전에 죽은 남편의 피를 받아 마시고 <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를 쓴 시인 아일린 더브의 삶을 추적한다. 데리언은 유령(아일린 더브)을 대신해 그의 '삭제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자신의 숨겨진 자아를 유령에 빙의 되어 토해내기도 한다. 엄마나 아내는 '나'가 아니다. 유령처럼 경계에 서 있는 이름들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데리언은 더불어 자신이 '이 시를 직접 번역할 만한 자격 같은 건 하나도 없다'며 한번 더 경계인으로서 고민한다. 그는 '박사 학위도 없고, 교수도 아니며, 어떤 허가서도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칭하며, 자신은 '그저 이 시를 사랑하는 한 여자일 뿐' 이라고 자조한다. 하지만 그 시를 번역하는 일은 집안일과도 닮아 있으며, 그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킨다.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차’ 안에서 씌여졌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데리언은 사망 날짜도, 묘비도 찾아내지 못한 아일린 더브라는 '내가 사랑하는 이 유령(242쪽)'과 같은 행위('그 여자의 임신한 몸으로부터 수백 년을 뛰어 넘어, 내 임신한 몸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불러내기 위해(34쪽)' )를 함으로써 서로 한 몸에 존재하게 된다. 영매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결코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삶에 출몰하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모두의 방에 장미향이 피어나게(237쪽)'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삶에도 동시에 출몰했다. 

 덕분에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나의 흩어진 기록들을 다시 그러 모아 본다. 왜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할 수 밖에 없었던, 하지만 하고 나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어느새 나의 삶의 삭제된 부분이 되었던 기록들. 오래된 나무 상자에 담겨 있던 블로그에 쓴 육아 일기를 엮은 책과 수유 일지를 쓴 메모장을 꺼낸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오래된 기록들을 비교해보며 공개된 공간-블로그에 쓴 일기와 내밀한  '수유 일지'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삼주간의 이야기를 모아서 하나씩 업로드 한 블로그의 일기에는 '출산이라는 멋진 무용담', '나 보다 너 혹은 우리 이야기에 집중하기', '언제쯤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웃을 수 있을까', '나에겐 아이가 그 어떤 것보다도 1순위, 엄마가 힘든 것의 10배 이상으로 아가는 세상에 적응하느라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을테니까', '아이의 수면 패턴 때문에 무척 힘들었으나, 원인이 결국 엄마였음을 알았다', '아이의 요구를 알고 열심히 들어주는 엄마가 된 것 같아 기쁘다.' 등등 날것의 이야기보다 마치 검열을 마친듯한, 정제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다림질 되고, 잘 여며진 옷차림 같았다. 

그런데, 매일 손글씨로 썼던 메모장의 '수유 일지'에는 나의 힘듦, 불안함 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우울하고 힘든주이다', '젖먹이는 기계가 된 기분이다', '좌절스럽고 우울했다', '가장 힘들고 우울한 하루였다', '유난히 힘든 하루였다', '땀이 쭈욱 난다', '집안은 엉망. 물한잔 먹을 새도, 화장실 갈 틈도 없다', '안아줘야 겨우 잠든다', '다리는 붓고 몸이 내몸 같지 않았다', '즐기면서 성공하자, 즐기면서 성공하자, 즐기면서 성공하자', '1401호 엄마, 00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지 말자. 내 이름 000, 000, 000', '그냥 욕 먹고 말자, 언제나 나는 옳다!' 등등 이 적혀 있었다. 그저 나오는대로 쏟아낸 나의 진실의 말들. 
수유 횟수만 건조하게 기록되어 있을 줄 알았던 수유 일지에 이렇게  군데 군데 나의 감정이 여과 없이 적혀 있어서 놀라우면서 처음엔 마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좌절의 순간들이 나의 목소리이자, 역사적 기록이자, '모유라는 하얀색 잉크'로 써내려간 몸부림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수퍼스타,  '아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잊혀지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었던 '나'라는 존재. 혼란스럽고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다독이려 애썼던 것이다.







지금 나의 아이는 만 열여섯, 나는 그때 만 스물여섯이었다. '아이'라는 내 인생에 만난 새로운 존재에 온 사랑과 책임을 다해야 했던 그 나이. 사실은 나를 사랑하는 법도 잘 몰랐던 때였다. 나 자신에게 친절해지기 시작한건 거의 마흔에 가까워서야 아니었을까. 나의 성인기 발달 과정은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수유 일지에 적어 내려간 이야기가 온통 아이를 향해 있더라도 나의 깊숙한 내면은 결국 나를 반짝이게 하는 '빛' 을 향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찾아낸다. 책에서 데리언이 딸의 이름을 바다 이름을 따서 붙이려고 하다가 충동적으로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골랐는데,  이렇게 우리 각자는 본능적으로 발견되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멀리가고, 오래가고 싶어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몇십억년이 지나도 먼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그러므로 이제는 나의 이 텍스트들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언제나 나의 기념품을, 진주와 마노로 만들어져 내 가슴 속에 단단히 박힌 이 내밀한 브로치를 한직하고 있을 거라고, 결함이든 장식이든,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이고, 나는 그것을 내 심장 가까이에 지니고(299쪽)' 다닐 거라고 다짐한다.

이 책에서 데리언은 가족 달력의 해야 할 일 목록을 지워나가고, 밤중에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유축을 하고,  밤중 수유 상황을 기록하고, 드디어 잠시 시간이 생기면 노트북 컴퓨터를 열고, 문서를 클릭한다. 그러나 마치 집안일처럼 정말 열심히 하지만 어딘가에 틈이 생기고 마는, 종종 어딘가에 발이 걸려 비틀거린다. 그렇지만 계속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가 멈추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아름답고 사랑하는 일이니까.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삶.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쓰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인 것들을 한아름씩 끌고 다니는 삶(100쪽.)' 이다.

책 속에 묘사된 그의 삶은 내 삶과 겹쳐 진다. 나 또한 지금 스마트 폰으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브리티쉬 팝을 들으면서, 빨래와 청소라는 그림자 노동을 하며, 그의 아이처럼 '아주 아주 배고픈 애벌레'를 어린 시절 읽혔던 틴에이저 첫째의 모의고사 결과를 궁금해하며, '머리카락에 새겨진 mtDNA라 불리는 오직 어머니로부터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물질 처럼' 오로지 모계로만 이어지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예지몽에 대한 믿음으로 얼마전 꾼 꿈이 좋은 징조가 아닐까 기대하며,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쓰면서 살고 있다. 데리언의 글과 아일린 더브의 시가 끊임 없이 교차되고 거기에 나의 과거 기록과 현재 일상이 함께 직조 되며 우리의 텍스트는 더욱 복잡하고 치밀해져 간다.  나는 그렇게 동시대성과 시대적 초월감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그리고 삭제되었던 내 이야기들은 그녀가 쏟아낸 검은 잉크들 덕분에 서서히 해독이 되어 간다. 

데리언이 지금은 관광지가 된 아일린 더브가 태어난 데리네인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우연히 흙 속에서 '섬세한 꽃 한송이가 그려진 델프 그릇의 파편'을 발견한다. 그것이 혹시 아일린 더브의 흔적이라면, 그것을 꼭 쥐는 행위는 또한 그녀와 연결되는 몸짓이다. 서로에게 사로 잡혀버리는.어쩌다 파묻혀진 그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도달하기 까지의 모든 과정은 ‘발화’의 과정이다. 데리언이 아일린 더브의 전생애 흔적을 따라 가는 것은, 다시 아일린 더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며, 외상적 사건을 반복적으로 직면하여 데리언과 아일린, 각자의 자아를 통합하는 이 과정은 모두를 치유한다. 충동과 환상에 의해 벌어졌으나, 결국 각자의 이름이 제대로 호명되게 하는. 
“ 내가 따라가는 모든 길은 다른 사람들의 몸이 써놓은 길이었다. 모든 길 위에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나는 좀 이상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내 몸 바로 저편에서 들려오는 과거의 한결같은 콧노래를, 꿀벌만큼이나 진짜처럼 느껴지는 그 노래를 듣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아이가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292쪽.”

마치 봉인을 마치고 발송된 편지처럼, 아일린 더브의 시는 쓰여 졌고, 구전 되며 200여년의 시간을 품었다. 첫 잉크 자국에서 부터 말이 흘러나와 데리언 니 그리파를 거쳐 지금의 나에게 전달되기까지 그 움직임을 담은 공간과 아일린 더브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아일린 더브의 말들을 내 입술 위에서 조용히 움직여 본다. 또 하나의 치유가 일어난다.

“ 나는 모유를 기부함으로써 어려운 가족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건 분명 공감이 촉발시킨 충동이지만, 그 과정에 다른 무언가가, 말하자면 '업karma'에 대한 미성숙하고 서구화된 관념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남들에게 도움이 될수록 그만큼 막 꾸린 내 가족 또한 보호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믿음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7쪽.”

아일린 더브의 삶을 추적하면서 과거의 여성과 연대한 데리언은 또한 모유를 통해 현재의 여성들과의 연대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마야 안젤루의 "삶을 사랑하라. 그것에 참여하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라.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왜냐하면 삶은 네가 행한 것을 몇번이고 돌려주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공감으로 인한 충동, 카르마의 선순환을 불러 일으키는 열정에 우리는 기꺼이 순응할 필요가 있다. 데리언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고, 그러기를 멈추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본능으로 충분히 감각할 수 있는 삶의 이치를 불러내오는 주문이다.

데리언은 남편의 '흰색 잉크'를 묶고(정관수술)나서야 그의 '흰색 잉크'(모유)를 멈출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잉크로 부터 추출한 나만의 검은 자양분(책)을 빨아들이며 검은색 잉크로 글을 써내려 갈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식어가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갑자기 나타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를 낯선 목적지로 끌고 가는 그 신비한 엔진(218쪽)'이 이끄는 본능에 사로 잡힌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그 일을 할 수 있고, 할거야(98쪽)".

데리언은 또한 아트 올리어리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암말의 죽음에 대해 , 하나의 여성이자 비인간 존재인 암말을 애도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이 말이 존재했음을 당신이 알았으면 한다(196쪽)". 

보이지 않는 잉크로 암호처럼 적힌 삶, 데자레베, 마법, 주문, 회의론자라면 우연이라고 부를만한 일, 또 하나의 삭제, 말소시킨, 전조, 깨어진 거울, 자리에 앉을 때마다 내보낸 모유의 하얀 음절들.

여자의 흔적들이 '삭제되고 지워진' 대신 남자는 '싹둑싹둑 잘려져' 나갔다. 여자는 앞으로 또 한명의 아이를 안아볼 수 없다. 다른 무언가를 기르기 시작할 것이다. 아직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고 이제 그것들은 결함이든 장식이든 늘 심장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도서협찬 #도서제공 #을유문화사 #데리언니그리파 #목구멍속의유령  #소설책추천 #소설추천 #암실문고 #문학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