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 가이 대븐포트는 작가, 번역가, 삽화가, 교육자, 그리고 학자이다. 그는 "동료 학자나 비평가 들이 아닌, 읽기와 그림 보기, 그리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쓴다"고 말했다. 가이 대븐포트의 이 에세이는 1982년 토론토 대학에서 개최된 알렉산더 강의의 강연 내용이다. 이 책의 번역가는 이 책을 우연히 만난 후,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며 읽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물질화 했다. <스틸라이프>는 정물화에 대한 안내서이기 보다 가이 대븐포트의 방대한 개인적 독서의 기록과 지적 탐구가 정물화에 대한 해석과 결합된 에세이 이다. 정물화에 대한 이 창의적인 해석들은 단순히 생활의 재현이나 고요한 명상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정물화에 대해 새롭고 다른 시각으로 깊게 보기를 훈련하게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식사에 대해 간단한 스낵을 가리키는 온트베이트, 연회나 쌓아 놓은 페이스트리를 뜻하는 반켓, 자유 지주의 화려한 식탁을 가리키는 프론크스틸레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특히 프론크스틸레번은 호화롭거나, 즐겁거나, 대단한 상차림일 수 있는데, 철학적이고 시적인 종류의 상징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원래 에피큐리언 식사는 역사적으로, 존경스럽도록 절제된 생활을 하는 철학자의 간소한 식사를 말하는데, 이제 '에피큐리언'이라는 말은 고급스러운 생활과 호화로운 음식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 또한 전복적이고 모순적이지만, 식탁위의 풍경- 정물화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정적이지만(차려져 있지만) 곧 움직여질(사람들에 의해), 풍요롭지만, 곧 손상되고 사라져 버릴. 이렇게 한 풍경에 상반되거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게 정물화임을 저자는 다양한 고전과 어원, 문학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서술해 가고 있다. 그 호흡은 정말 빠르고 예측할 수 없어서 때로는 고대와 근대의 작가들이 한문장에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섬세한 주석 덕분에 낯선 이름도 금세 익숙해지고, 나아가 좀 더 찾아 보고 싶어 진다.
정물화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 무덤 속에서는 접시와 단지가 발견 되는데, 무덤 벽에 그림을 그려서 영혼이 그 그림속 음식으로 연명하게 하려 했음을 예로 들며 이것이 정물화의 기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 하나의 예는 아모스서에 나온 '여름 과일 광주리' 이다. "여름 과일 광주리는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보여준다. 헛되고 헛되도다, 죽음을 기억하라. 정물은 하나님의 자애로움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정물화는 소박한 예술이다. 마치 소네트 같기도 하고, 대작의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형식 같기도 하다. 정물화는 풍경화와 다르게 시대를 뛰어넘어도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사과와 배와 더불어 빵과 와인은 유럽 정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저자는 모네의 <점심 식사>와 다게르의 최초의 정물 다게레오타이프도 도상학 적으로 분석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 운명의 두상 - 몸이 없는 머리 그 자체
도시인에게는 전설과 우화가 가진 에너지와 인기를 담은 설화(도시 전설?)가 있는데, 예를 들면 돈키호테, 셜록 홈스, 타잔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인물들은 다른 작가들이 차용하기도 하고, 일반 대중의 상상속에 위치하게 된다. 레퍼런스로서 다른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 된다.
이 챕터에서는 과학자, 딜레탕트, 시인, 컬렉터, 온갖 아마추어의 방들에 대한 이미지를 상상케 함으로써 시작한다. 셜록 홈스의 방에 놓인 정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는데, 특히 홈스 방에 있던 홈스 자신에 대한 흉상이 홈스가 감당 해야했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이자 동시에 다른 두 장소에 있게 하기 위한 책략으로 소개한다. 두상은 정물을 완성 시키는, 탁자 위에 올려놓아야 할 필수품이기도 했다.
그런데 홈스의 흉상은 흉상이 그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예술은 주기적으로 상징적 의미가 고갈 되며 가치 절하의 시기를 겪음을 보여준다. 의례와 숭배가 이루어지는 신비한 장소를 지정하면서 시작된 그 예술 말이다. 고대의 영웅들의 이미지로 주로 제작되는 두상들은 고대의 정신이 우리 시대에 와서 지성으로 살아 남는다고 예술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특하고 지적인 명철함으로써. 하지만 탁자 위의 흉상은 상징이 지나치게 연결되어 소통의 힘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어서 에드가 엘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오르페우스의 참수된 머리에 관한 신화를 고딕 모드로 바꾸어 재구성 한 것이다. 그리고 어셔가의 정물에는 잠시 연주를 쉬고 옆으로 밀어 둔 악기 하나, 악보, 신문, 파이프, 과일이 담긴 그릇, 고전적인 형태의 흉상등 지난 5백년간 전형적인 정물을 이루어 온 오브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악기는 오르페우스의 리라일 수도, 흉상은 디오니소스의 가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정물에는 책들과 철학적인 사색에 필요한 물건들, 즉 파이프 한 개, 악기 하나-셜록 홈스의 경우는 바이올린, 로더릭 어셔의 경우는 기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경우는 플루트였다. 월든 호수에 있던 소로의 탁자 위에는 그리스어로 된 <일리아스> 한 권, 돌, 잎사귀, 그리고 플루트가 있었다. 와인 잔과 와인 병, 홈스의 경우는 커피 또는 찻주전자였고, 와인은 그가 사건을 해결한 경우 축하 저녁을 들 때 놓였다. 64-65쪽.
정물은 사람이 읽고, 먹고,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대화하는 문명화된 집 안에 어떤 공간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고대의 식당, 즉 집 안에서 사람들을 대접하고 즐기는 공간(플라톤의 심포지엄,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있었던 2층 다락방, 보이오티아에 있는 플루타르코스의 편안한 집)에서 중세의 서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전통이다. (84-85쪽.) 저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의 어셔의 책 목록을 나열하며 하나씩 소개한다. 에드거 앨런 포는 어셔가의 서재 탁자 위에 그가 아는 정물의 전통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해서 "많은 책과 악기 들"로 탁자 위 정물들을 배열했다. 책 또한 정물의 일부를 차지하며, 정물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정물에서의 '흉상'과 '두상'은 몸이 없는 머리 그 자체다. 머리는 뇌로 치환되어, 르네상스적 거만함, 현학성, 명민함과 시적 감수성을 상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지성에 반하여 두상은 어쩌면 참수된 머리로서 공포와 야만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두상은 숭배의 대상이면서 삶의 한계와 무상함,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게 한다.
3. 사과와 배 - 유혹과 화해, 상실과 구원
이 챕터에서 인상적인 것은 정물에서 사과와 배는 남편과 아내이자, 정물화의 오랜 역사를 통해 사과와 배의 조합은 한 쌍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세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은 사과와 배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와 함께 그렸는데, 사과는 추락을 배는 구원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목가시에 사과를 선물하는 것은 사랑의 선언이고, 배는 조화와 거듭남이다. 사과는 유혹하고 배는 화해한다.
사과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일화로 세잔이 전학생 에밀 졸라를 친구로 맞게 되며, 졸라는 세잔의 집 현관에 사과 한 바구니를 갖다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잔이 받은 사과는 고대 시 속에서도 친구와 연인에게 주는 선물이었으며, 그들은 둘 다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시를 사랑했기에 사과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후에 둘 사이의 갈등도 있었지만, 세잔이 후에 그린 정물화를 보면 사과와 더불어, 배, 에로스의 동상, 시골 부엌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등장 시켜 화해 무드가 연상케하는 평온함을 보여 준다.
저자는 반 고흐의 정물과 상징에 대해서도 이 챕터에서 다룬다. 1889년 1월, 빈센트 반 고흐는 <양파가 있는 정물>을 그렸다. 귀를 절단한지 23일째 되는 날로, 귀 절단 사건과 <양파가 있는 정물>은 연관 되어 있으며, 정물화는 그 사건에 대한 명상이자 사면을 뜻한다. <양파가 있는 정물>은 무엇보다도 질병과 건강의 기록이다. 반 고흐는 귀를 자르기 전 몇 주 동안 화이트 와인과 담배로 살았다고 한다. 고갱에 대한 실망감에 더하려 그러한 식생활은 그의 신경을 터지기 직전의 전선처럼 만들었다. 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의 양파는 영양가 있는 음식인데, 올리브 오일까지 정물에서 엿보이니 그의 회복에 대한 의지를 짐작할 수도 있다. 양파는 음식인 동시에 조미료이자 담배나 와인처럼 시대에 따라 약으로도 쓰였다. 사과(추락)와 배(구원) 대신 양파를 통해 고흐는 상실과 구원에 대해 표현했다. 양파가 사과와 배가 결합된 존재로서 그림 속 모든 것을 하나의 복합적인 상징으로 엮는 역할을 한 것이다.
4.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 - '낯설게하기', 새로운 세상의 탄생
토리노에서 죽음을 맞이한 니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지만 토리노!...나는 지금 정말 이 도시에 있어야 하네!"라고 썼다. 쓰러지기 전에 니체는 모든 역사와 의미는 자의적이라고, 우리 머릿속에서 지어낸 픽션이라고 결론 내렸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또 반복하여 일어난다는 사실 뿐이었다. (......) 제임스 조이스가 <피네건의 경야>에서 말한 것처럼 "같은 것이 새롭게 반복된다." 니체의 방은 조촐하고 한쪽에는 책이, 탁자위의 물건들은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침대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채였다고 한다. 그가 만들어낸 탁자 위의 정물, 토리노에 대한 멜랑콜리, 그리고 니체가 생각한 '되풀이 되는 운명'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업에 영감이 되기도 했다.
데 키리코는 니체도 사용한 단어인 '에니그마'를 통해 '낯설게하기' 기법을 사용한다. 진실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처럼 보는 것이다. (171쪽.) 요즘 데 자뷔를 거꾸로 한 뷔자 데(Vuja de)라는 말이 쓰이는데, 매일 겪은 익숙한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뜻하며, 역발상, 새롭게 보기를 강조하는 단어라고 한다. 이 또한 에니그마로써 모든 것에는 상반된 두가지가 존재하기에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시야를 넓히는 것의 필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하여 데 키리코는 그의 작품에서 토리노라는 도시의 구성물들을 왜곡해서 구성하거나 낯선 방식으로 배열해서 그 도시의 현실을 탐색하였다. 신비로운 멜랑콜리는 일관된 질서의 종말감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세상의 탄생을 예고한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우리는 정물화에서 어디서 물질이 끝나고 정신이 시작되는지에 관한, 그리고 그들의 상호 의존성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발견한다. 물질이 놓여 있는 구도, 배치, 도상학적 의미, 신화적 레퍼런스, 문학적 이해, 종교적, 인류학적 오브제 등등이 반복된다. 오랫동안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했던 정물화는 종교적 그림에서부터 세속화 되는 과정을 거쳤고, 이렇게 신성한 주제는 도상학적 책임을 고집스럽게 유지해 왔다. 피카소의 빵, 와인, 책에 대한 끊임없는 주제는 신화의 지속성을 보여 주며, 조이스에 와서는 신성한 것이 세속적인 것으로 돌아 간다. 시대를 거듭하며 정물화의 운명은 혁신에서 진부함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낯익음 속으로 사라지고 했다. 필연적으로 정물화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또는 스타일의 전형으로 스스로를 재생해 왔는데 말이다.
이 책에서 정물화 속 여름 과일 광주리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또한 정물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두상은 몸이 없는 머리 그 자체로서, 지성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정물화의 단골 소재인 사과와 배는 유혹과 화해, 상실과 구원을 상징하며, 반 고흐는 그것의 결합으로 양파를 그리기도 했다. 토리노를 사랑한 니체는 모든 것의 반복을 이야기 하면서도 에니그마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추구한다. 그의 영감을 받은 데 키리코는 그렇게 토리노를 낯선 방식으로 배열한다.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은 다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하기도 한다. 모든 정물에는 상반된 것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역사도 정반합 안에서 반복하여 흘러감을 이 책에서는 계속 이야기 하고 있다. 정물화는 그렇게 반복되는 운명과 새로운 방향을 제기하는 스타일을 동시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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