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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컴플렉스님의 서재
  • 아구아 비바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12,150원 (10%670)
  • 2023-06-20
  • : 3,451
생生과 타인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 - 대답이 돌아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먼저 고백하는 일에 대하여

당신에게 나의 토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지금-순간'들로만 이루어진 말들의 문장을 만든다. 그러니, 읽으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졸졸 흐르는 음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은 순수한 진동이다. 이걸 읽으라 :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나는 이집트의 비밀을 잃어버렸으니, 그때 나는 말과 그 그림자에 홀린 채, 전자들과 양자들과 중성자들의 힘찬 움직임과 함께, 경도와 위도와 고도 속을 움직여 다녔다."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쓰는 것은 하나의 회로도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 그저 지금인 것. 14-15쪽.

내 안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음악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허공에서 교차하는 기하학적인 선들로 이루어졌다. 그건 실내악이다. 실내악에는 멜로디가 없다. 그것은 침묵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나는 당신에게 실내글을 보내고 있다. 75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 <아구아 비바 Agua Viva>는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이고, 일반적으로 해파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뼈대가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 둘은 자유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유영하는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과 에세이와 철학서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관념들을 그리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그린다. 아니면, '무', 영원이나 무나 결국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16쪽.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모든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 나는 아주 새롭고 참된 단계로 진입하면서 그 단계 자체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건 그림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직접적이다. 마치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 나는 그 순간들 속으로 깊이 내려앉았고, 그랫 그것들을 지나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주위를 둘러싼 에너지에 닿은 상태이며 나는 몸서리친다. 어딘가 미친, 미쳐버린 조화. 나도 안다, 내 시선은 세상에 완전히 항복한 원시인의 시선과 같을 것이다. 선이 굵은 선과 악만을 허용하고, 머리카락처럼 악에 뒤엉켜 있는 선에 대해서는, 선이기도 한 악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신들처럼 원시적인 시선. 17-18쪽.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31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소설가 정지돈의 인터뷰에 따르면 글쓰기는 '내가 썼나? 싶은 것, 나를 넘어서는 것, 영향속에 있으며 내것이 아닌것'이라고 한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글쓰기라는 '받아쓰기(넋을 놓은 글쓰기)‘에 대해서 사유를 이어 나간다. 그녀는 초기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부터 유작 <별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대비되는 이미지를 계속 이용하고 있다. 순간과 영원, 원시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탄생과 죽음, 나와 타인, 인간과 비인간, 과거와 미래 를 교차하며 결국 우리의 지금에 대해서 감각하기를 제안한다.

나는 관념을 추구하지 않고 직관을 이용해 나아간다 : 나는 유기체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나는 거의 고통에 가까운 강렬한 행복감 속으로 뛰어든다 - 그러고는 내 머리칼에서 솟아난 잎사귀들과 가지들로 나를 장식한다. (......)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로 만든다. 내겐 목소리가 있다. 그림의 선 속으로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쓰기 역시 내게는 계획 없는 삶이 펼치는 활동에 속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질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내가 가진 질서라고는 숨 쉬는 순서 뿐이다. 나는 나를 놓아둔다.
35-36쪽.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나는 그 핵심에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41-42쪽.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의 노력 : 미래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기. (......)

나에게 귀 기울이라, 나의 침묵을 들으라. 내가 말하는 건 절대로 내가 말하는 게 아닌 다른 무엇이다. 내가 "풍요로운 물"이라고 말할 때, 내가 말한느 건 세상의 물들 안에 있는 몸의 힘이다. 내가 진짜로 말하고 있는 그 '다른 것'을 붙잡는 게 바로 내가 한 말들이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는 그걸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침묵 속의 에너지를 읽으라. 아, 나는 신과 그의 침묵이 두렵다.

나는 나 자신이다. 45-46쪽.

​하지만 그 안에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 것, 즉 보편적인 '그것'에 관한 수수께끼도 들어 있다 : 내 안에는 보편성이 있으며, 그건 가끔 내 안에서 흘러넘치곤 하는 개인적인 것들에 의해 썩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 45-46쪽.

내가 볼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를 가장 감동체 하는 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 진실은 어딘가에 있다 : 하지만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나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그런데도 나는 그것으로 산다. 48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먼저 고백하는 일이다. 상대가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고의 글은 꼭 저 동물들처럼 나타난다. 갑작스럽게, 태연자약하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 없음에 가까운 말로,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사막, 자기 자신의 야생일지도 모른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별의 시간을 향하여

세상 속의 나에 대해, 나를 인도하며 내게 세상 자체를 가져다주는 힘에 대해, 투명한 구조가 지닌 활기찬 관능성에 대해, 다른 굴곡진 형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굴곡들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의 필체와 나의 회전들은 강력하고, 여름에 불어오는 자유는 그 안에 치명성을 지녔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들어 있는 에로티시즘은 공중에 바다에, 식물들 속에, 우리 안에 흩어져 있고, 또한 내 목소리의 열렬함 속에 흩어져 있어, 나는 목소리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탄탄한 나무의 몸통과 뿌리가 지닌 활력이 있다. 그 뿌리는 수많은 자양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나무에게 반응하는 땅속에, 살아 있는 땅속에 묻혀 있다. 나는 밤에 그 에너지를 호흡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환상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 환상적인 : 세상이 내 마음이 구하는 모습과 일치하는 한순간. 나는 곧 죽을 것이며 새로운 구성 요소들을 조립해 세울 것이다. 나는 아주 서툴게 자신을 표현하는 중이다. 63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생성하고 원자혁명을 초래한, 단순한 외견들의 이면에 있는 '참된 실재'를 탐색해온 현대적인 방식은 인간을 바로 그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상실한 모종의 과학적 상황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로 '객관적 실재'를 탐색하는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과 홀로 직면하게 된다"라는 사실을 불현듯 발견했다.

외계로 쏘아 올려져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실제로 물리적인 접촉을 하는 즉시 죽음을 부르게 될지도 모르는, 도구들로 가득 찬 우주선에 갇힌 우주비행사를 하이젠베르크적 인간의 상징적인 화신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 및 인간이 만든 사물과 만나지 않을 가능성이 줄어들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저 비인간적인 세계와의 조우에서 모든 인간 중심적 고려 사항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인간형이다.
479쪽.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 우주 정복과 인간의 위상>

혹은, 어쩌면 신을 영접할 자격이 가장 부족한 자들이야말로 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불안하고 거칠며 아무런 가망이 없다. 내 안에는 사랑이 있지만 나는 사랑을 사용할 줄 모른다. 가끔은 사랑이 가시처럼 생채기를 낸다. 내가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아들였는데도 불안하다면, 그건 신이 나에게 와야만 하기 대문이다. 너무 늦기 전에 오라. 나는 살아 있는 자들이 모두 그렇듯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죽기전에 평화를 누릴 것이고 또 언젠가는 삶의 섬세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음식의 맛을 먹고 그것을 사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당신 침묵의 심연으로 떨어진다. 당신은 침묵 속에서 내 글을 읽는다. 하지만 나는 이 무한한 침묵의 장에서 날개를 펼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최악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핵심으로 들어선다. 그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다. 느낄 수 있는 핵심. 그리고 그것은 나를 전율케 한다. 90쪽.
분명 당신은 내게 세상을 왜 돌보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의무이기 때문이다. 99쪽.

나는 늘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떤 기운이 감돌고 -- 내 몸은 새로운 것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나는 온통 곤두선다. (......)

​우리는 가까이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꽃들이 천천히 열리며 새 계절에 투항한다. 놀란 우리의 눈앞에서 :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나는 주고 주고 또 준다. 옷을 따뜻하게 껴입는다. 그리고 따스한 내 가슴에 사람들을 품어 준다. 당신은 누군가가 따끈한 수프를 먹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금 나는 비 오는 날들을 산다 : 주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102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을 때 그 대가로 악의적인 태도, 배은망덕, 배신이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불행을 아주 조금 함께 겪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그들의 불행을 함께 겪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럴 힘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한정된 어떤 사람들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듯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결부된 게 아니다. 완전성이 그러하듯 생지옥의 불행에는 어느 정도 비개인적인 것이 있다.

'나'가 죽어버린 사람들에겐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러나 '나'가 완전히 죽었는지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주사를 놓아 사람을 살리듯이 사랑으로 다시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거만한 호의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
42-43쪽,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당신은 이 일이 아이가 태어나는 일과 같다는 걸 모르겠는가? 이 일은 아프다. 고통은 악화한 삶이다. 그 과정은 아프다. 존재-되어-가기는 느리고 느리며 선한 아픔이다. 될 수 있는 한 넓게 늘어나는 거니까. 그리고 당신의 피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숨을 쉰다. 숨을 쉰다. (......)

어떤 사람이 숨을 쉬지 못하면 우리는 입과 입을 대고 인공호흡을 한다 : 그 사람의 입에 우리의 입을 대고 숨결을 불어 넣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렇게 숨결을 나누는 건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들 가운데 하나다. 입과 입을 대는 일의 아름다움에 현기증이 일 것 같다. 102-103쪽.

​지금 나는 조금만 죽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제발 -- 죽어도 될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고맙다. 105쪽.

​나를 이끄는 건 하나뿐이다. 발견한다는 느낌. 생각 너머에 있는 것 너머에 있는 것들을.

지금 내가 당신에게 글을 쓰면서 진짜로 하고 있는 건 이런 것이다 : 나 자신을 따라가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따라가기. 가끔은 그게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의 성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포기하고 만다.

​두려움이 가셨다. 내가 하려던 말 : 나는 불협화음에서 조화를 느낀다. 멜로디는 가끔 신물이 난다. 이른바 라이트모티프(leitmotv, 음악 작품 내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물, 감정 등을 상징하는 선율)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음악 소겡서,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쓰는 것 속에서, 그리고 내가 그리는 것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기하학적인 줄기들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서로 부조화를 -내가 이해하는 그것을 - 이루는 것. 순수한 그것. 내 존재는 완전히 열중하고 약간은 도취된다. 106-107쪽.

​나는 나 자신을 조직하기에 앞서 내 내부를 와해시켜야 한다. 자유의 원초적인 상태를, 그 최초이자 덧없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자유, 실수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설 자유.

​하지만 만일 내가 세상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해하기'를 추구하게 된다면 --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뛰어들어야만 하며, 그 뛰어듦은 이해와 몰이해를, 특히 몰이해를 아우를 것이다. 게다가 내가 뭐라고 감히 생각이라는 걸 하겠는가? 내가 할 일은 투항이다. 투항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오직 걸어야만 걷는 법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적 -- 사실을.

​근면한 거미처럼 미래를 만들어 가는 나. 내게 최고의 순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라도 만드는 때이다. 110쪽.

​우연의 필연성에 의해 선택된 소수의 사람만이 삶의 초연하고 섬세한 자유를 맛본다. 그건 화병에 꽃을 어떻게 꽂아야 할지 아는 것과 같다 : 거의 쓸모 없는 지식. 그 덧없는 삶의 자유는 결코 잊혀선 안 된다 : 향기처럼 존재해야 한다.

이 삶을 사는 건 직접 살아간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기억하는 일에 더 가깝다. 112-113쪽.

​그리고 나는 측면에서 산다 -- 중앙의 빛이 나를 태우지 못하는 곳. 114쪽.

​하지만 나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붙잡을 수 있는 법을 거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방법은 단 하나,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게 무엇이건 살아가는 것이다. (......)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각각의 일들, 나는 그것들을 여기에 적음으로써 그것들을 산다. 왜냐하면 나는 이 탐색하는 손으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닌 신경을, 살아서 진동하는 그 신경을. 115쪽.

​나는 살아 있다. 하나의 상처럼, 육신 속의 꽃처럼, 슬픈 피의 길이 내 안에 열린다. 올곧게 직진하며, 바로 그 이유로 라고아 산타(브라질 중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선사 인류 화석이 집중적으로 발견됨) 원주민들의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지닌 길. 나, 폭풍에 노출된 자, 돌의 뒤편에 새겨진 글귀, 나는 선사의 인류로부터 건네 받은 거대한 공간들, 시간순으로 늘어선 그 공간들 속에 있다. 기나긴 천 년 세월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내 표면을 그슬린다. 122쪽.

​과거의 순간에 보았던 기억을 통해 보지 않는다. 그 순간은 여기 이것이다. 숨 막히는 절박함을 지닌 순간. 그 자체로 절박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살고, 나는 그 순간이 다른 순간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으로 뛰어든다.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123쪽.

​교회 정문 속에 있는 나의 대칭은 한곳을 향해 모이는 것이며, 이미 완성된 것이며, 그러면서도 독단적이지는 않다. 거기에는 두 비대칭이 대칭 속에서 만나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그것이 제3의 해법이다 : 통합. 그 교회 때문에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어 보이는 건 어쩌면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보이는 무책임한 대담성이 아닌, 살고 또다시 살았던 그 무언가가 지닌 섬세함. 아니, 당신이 거기서 발견하는 건 고요함은 아니다. 부식되었을지언정 아직 서 있는 그 문은 치열한 싸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짙은 색깔들 속에는 구부러진 채로도 계속 나아가는 그 무엇 특유의 납빛이 있다. 내 십자가들은 여러 세기에 걸친 고행으로 구부러졌다. 그 문은 애초에 하나의 전조였을까, 제단의 전조? 문의 침묵. 거기에 서린 푸른 녹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그 무언가의 색을, 그리고 황혼의 강렬함을 지닌다. 124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캠벨 : '되기' 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모이어스 :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캠벨 :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410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인 '있음'의 온전한 현실태로서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것과 동시에 발생한다. 시간의 심장부에 마련되는 이 작은 비-시공간(non-time-space)은 단지 암시될 수 있을 뿐, 과거로부터 승계하거나 물려줄 수 없다. 새로운 세대는 물론이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에 틈입시킴으로써 이 통로를 발견해야만 하고 꾸준히 그것을 새롭게 닦아야 한다.
92-93쪽,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 서문 :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

은총과 지복아래 -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금 -- 침묵과 약간의 경이.
왜냐하면 7월 25일 오늘 아침 다섯 시, 나는 은총의 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갑작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너무도 온화했다. 공중에서 광휘가 미소 짓고 있었다 :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건 세상의 한숨이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은총의 상태는 어디에도 쓰이지 않는다. 그 상태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그저 우리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려고 찾아오는 듯하다. 이 상태, 사람들과 사물들이 발산하는 평온한 행복감 너머에 있는 상태, 거기에는 맑음이 있고, 나는 그 맑음을 무중력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은총 안에서는 모든 게 너무도 가볍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게 선물임을 느낀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고 의심할 수 없는 현재를, 기적적이면서 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을.

이 은총은 그와 다른 것, 그저 평범한 자가 얻는 은총이다. 이 은총은 불현듯 실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평범하며, 인간이며,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식의 명상도 하고 있지 않았으며, 아무런 종교적 독실함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침을 먹을 후, 재떨이 위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와 함께, 그저 앉아서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약을 한 게 아니었으며 환각을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누구고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자유'라고 불리는 생각은 생각하는 행위 가운데 자유로운 것이다. 너무도 자유로워서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조차 생각의 작자가 없는 것처럼 느낄 정도다.

​진정한 생각은 작자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지복도 그와 똑같은 특성을 지녔다. 지복은 생각이라는 행위가 형태의 필요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순간 시작된다. 지복은 '생각하기 -느끼기'가 생각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뛰어넘을 때,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그가 '무'의 장엄함에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나는 '무'가 아니라 '모든 것'이라도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이고 양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다. 진정한 한량없음은 '무'이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 느낌을 흩뿌릴 수 있는.

이 지복 자체는 종교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 내 말은, 어떤 사람이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이 '생각 - 느낌' 은 서로 극도의 불통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아무런 궤변이나 역설 없이 말하건데, 그 불통 지점은 그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소통을 제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소통한 것이다.

​우리를 이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한 생각 가까이로 데려가는 건 바로 잠이다. 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경우, 꿈은 일차적인 사고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잠은 당신 자신을 추상화한 다음 '무' 속으로 흩뿌린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은총의 상태가 주는 자유 다음에는 상상의 자유가 올 수 있다. 정확히 이 순간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 너머에서, 그 공허 너머에서, 나는 반복되는 음악적 파동 가운데 가장 고요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 광기, 자유로운 창작의 광기.
141-148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캠벨 :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 입니다. 412쪽.
캠벨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227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일차적인 사고는 말로 이루어진다. '자유'는 말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케 한다. 150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415쪽,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 어둡고 습한 새벽에 건조하게 메아리치는 타자기다. (......) 나는 생각 - 느낌 너머의 너머에 있는 물체 안에 있는 것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나는 절박한 물체다. 141쪽.

​나는 인간의 조건에 신물이 난 자다. 나는 거역한다 : 더 이상 인간이고 싶지 않다. 누구일까? 내가 몹시도 부러워하는 동물들- (......) 내가 갖지 못한 건 우리가 아는 그 진실을 말할 용기다. 151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 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211쪽, 조셉 캠벨, 빌 마이어스, <신화의 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눈물이 났다.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을 따라 읽어가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는데, 그것은 작가의 말을 이해하려는 시도 보다, 그저 그 순간을 감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척 급해지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붙잡고 싶고, 감정은 밀려오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읽었던 책들이 밀려오고, 그 책의 저자들을 모두를 불러내 대화를 하고 싶고, 더 나아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불러내 내가 이해한게 맞는지 확인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왜 쓰냐"고 물으면 "당신은 왜 물을 마시냐"고 되묻는 사람이다. 그래서 확신이 없는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가 떠오른 대로, 오로지 지금에 의지해서 적어나가는 것. 끊임없이 그저 받아쓰기를 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첫 작품,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녀의 작품 세계는 <별의 시간>에서 결국 마무리 되지만, 이 <아구아 비바>가 그 '메탁시(사이)'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대립되는 개념과 이미지를 꺼내 보이면서도 역설적이면서 포용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영역을 보여주는 그녀의 글쓰기는 신화, 종교, 양자 역학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힘은 바로 '사랑'에 있다.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거는 형식의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듯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걸 알면서도 보내는 러브레터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과거와 미래 보다 '있음'에 집중함으로써 '말을 거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듯 하기도 하다. 두 비대칭이 대칭속에서 만나기를 희망하며, 불협 화음에서 조화를 느끼고, 우리의 입에 그녀의 입을 대고 숨결을 불어 넣는 인공 호흡을 해주며, 지복을 좇기를 바라는 그녀의 이야기가 내가 '살아 있음 viva’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건 끝나지만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것은 계속 된다. 그것은 좋다, 아주 좋다. 가장 좋은 건 아직 쓰이지 않은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 155쪽
내가 당신에게 쓰는 이것은 계속되며 나는 홀려 있다. 156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참고 문헌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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