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정신을 중력과 화해시키고 건축의 사유를 무게에 주고 있다면, 무용은 몸을 가벼움과 화해 시키고 몸에게 우아함을 부여한다. "무용은 날개다" 라고 말라르메는 말한다. 순수 예술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무용보다 더 완벽한 미적 공존관계를 구현하는 몸과 정신의 지성을 더 잘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무용은 살이 정신이 되는 순간, 몸이 자신의 타자로 변형되고 몸이 자신의 놀라운 역량을 폭발시키는 순간이다. 샹탈 자케, <몸>
샹탈 자케의 글을 보면 무용은 단순히 이야기나 신체의 아름다움을 전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이 자신의 타자로 변형되고, 몸이 자신의 놀라운 역량을 폭발시키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넘어선 작품을 만든 무용가들 중 하나가 피나 바우쉬이다. 피나 바우쉬는 어린시절부터 사람을 관찰하는걸 좋아했고, 우연히 어린이 발레단을 시작으로 무용 영재로서 엘리트 코스만 밝았으며, 뉴욕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2년여간 공부하고 부퍼탈시에 돌아와 무용 단장이 되고, 탄츠테아터를 만들게 된다. 탄츠테아터는 무용과 연극의 합성어이며, 연극과 춤을 구별할 수 없는 개념으로 관객의 거부와 저항을 감내하고서도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조함으로써, 피나 바우쉬는 탄츠테아터 부퍼탈을 이끌며 다시 독일 땅에서 모던 댄스를 부활시켰다. 계속 논란을 일으키고, 늘 새로운 도전을 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했던 그녀는 암 선고를 받은지 5일뒤에 죽었으나, 그녀의 정신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넬켄 라인Nelken line> 이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작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소소한 에피소드에 일상을 반영했다. 에피소드들은 때로 공격적이고 난폭하다가 다시 부드럽고 시적이며 항상 마음을 움직이고, 절대로 감동은 주지 못하는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누구나 알아채는 너무나도 많은 인간적인 것과 참된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군무가 독무와 교대되고, 작은 연극 장면이 춤과 번갈아 나타난다. 까다로운 초기 작품들의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측면은 1990년대 이후로는 유쾌함과 생의 기쁨을 발산하고 무용수들이 마법 같은 독무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작품들로 바뀌었다.
안무가는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 똑같이 중요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항상 앙상블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했다. 나중에는 무용수들의 선별된 작품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활용되지 않아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피나 바우쉬는 정기적으로 옛 작품들을 레퍼토리에 다시 넣었는데, 이는 공이 많이 드는 공연 연습과 때로 배역 교체와 연관되었다.
피나 바우쉬는 공연 연습 중에 "아름다운 것들은 뭔가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니, 희한하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춤은 그녀에게 폭넓은 개념이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답니다. 특정한 의식, 특정한 내면적, 신체적 태도, 매우 높은 정확성과 관련 되어 있어요. 앎, 호흡, 디테일 하나하나와 말이예요. 언제나 '어떻게'와 관련되어 있지요. 춤인 게 너무 많아요.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도요." 그녀가 흔치 않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말이다. 49-50쪽.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강한 여성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라,- 어쩌면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서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 도로 내 달팽이 집으로 들어가 버리거든요. 또, 거기에서 종종 내가 원래 좋게 여기지 않는 구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그건 이따금 함께하기 대신 대척하기 처럼 들려요." 50-51쪽.
그녀는 어린 시절, 삼남매의 막내로 많은 자유를 누렸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여관 테이블 밑에 숨어 많은 손님들을 관찰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손님들의 권유로 어린이 발레단을 접하고 발레에 입문하게 된다. 그녀는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 받아 장학생으로 폴크방슐레(오늘날 폴크방예술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모든 무용 스타일을 가르치는 교육이 지닌 폭넓은 토대뿐만 아니라 곧 자신이 춤꾼으로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낸 것도 중요했다. 내가 할 말이 무엇이고, 나를 어떤 방향으로 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그녀는 독일고등교육진흥원의 장학금 받아 뉴욕의 줄리아드스쿨에 진학해 뉴욕에 머무르게 된다. 뉴욕 생활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녀는 모든게 뒤섞이는 사람들과 도시의 모든 문화적 영향을 빨아들였다. 낯선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고, 다양성과 문화의 공존에 대한 동경은 평생동안 그녀를 특징지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무용단에서도 다문화적인 영향들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녀는 고전 발레와 반대로 좀 더 현실에 가까운 표현을 선호했다. 우리가 왜 무엇인가를 하는지,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무용수로서의 자기 이해가 중요했다. "나에게 춤은 나를 가장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형식이에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언어예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1973년 이후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세우고 탄츠테아터 단장이 된다. 그녀는 쏟아지는 일과 기대에 대한 부담 속에서 자신의 창의적인 직감을 따라야 하고 사전에 구상들로 스스로를 너무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계획된 작업 도중에 완전히 다른 것들에도 갑자기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것들은 계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지요. 계획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끼어들 것이냐."
이러한 개방성은 그녀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된다. 그녀의 작업은 틀도 없고 확정된 음악도 없고 무대디자인도 없으며 이야기도 없고, 오로지 모호한 주제만 있었는데, 그녀는 무용수들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모호한 주제에 접근했다. 이런 열린 태도 덕분에 무용수들은 무대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갖게 되고, 예측할 수 없는 각자의 생명력 있는 아이디어들이 난무하며, 모호함은 미완 보다 확장의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감정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이로써 대부분 옳은 쪽을 택했다. 당시 그녀는 공연 시즌당 두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은 이 초창기에 자신의 엄청난 창조성을 역설하는, 그리고 어쩌면 또한 자신을 의심하는 모든 이에게 이를 보여 주려는 야심을 역설하는 고된 일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기치로 <일곱 대죄>(1976)의 2부인 <두려워하지 말라>에서 피나 바우쉬는 더욱 분명하게 탄츠테아터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곱 대죄>에서 남성들은 여성으로 분장한 채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자신들이 관객인양 행동하기도 한다. 바우쉬는 연기자들을 역할에서 반어적으로 벗어나게 만든다.
양성구유에 대해 침묵하기를 강요당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어 17세기 초까지 양성구유는 화형대에 처해야 할 악마적 현상처럼 간주되었다.
인간 종은 엄격하게 둘로 나뉘지 않으며, 이원성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다양성을 인정한다. 우리가 양성구유라고 부르는 것은 드문 경우들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범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젠더의 성별적 구분을 다시금 문제시 하고,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분법 바깥에서 인간성을 보다 넓게 사유할 것을 권하기 때문이다. 샹탈 자케, <몸>
그녀의 작품에서 부조리한 무대장치와 이를 동반하는 인물들의 과장된 표현은 작품의 희극성에 종종 이바지한다. 예컨데 <일곱 대죄>나 <카네이션>, <대나무 블루스>에서 여성복을 입은 남자들과 역할 교환은 낯설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 내고, 역할에 대한 상투적인 표상들의 배경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리온 치토(의상 담당자) 는 "나는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을 좋아해요", "그럴 때면 언제나 의상 셀렉션이 준비되어 있지요"라고 털어놓는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의 '드레스를 입은 남자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양성구유성'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분법 바깥에서 인간성을 보다 넓게 사유하기를 권하는 피나 바우쉬의 예술 철학을 반영하는 듯 하다.
피나 바우쉬의 호기심은 그녀를 항상 더 멀리 이끌었다. 그녀는 탐구욕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시험해 보고 배우고 발전하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이에요. 하지만 말로 말고요.- 나는 결코 답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답니다." 이로부터 그녀의 질문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는 그녀의 열린 작업 방식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그녀는 작품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는지 정확히 알 때까지 우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때 질문은 그녀가 적절한 표현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8년에 초연된 <콘탁트호프>는 피나바우쉬의 작품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2000년에 <'65세' 이상 신사 숙녀>버전이 나오고, 2008년에 <'14세' 이상 십 대> 버전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부퍼탈 주민, 연기자도 아니고 무용수도 아닌 그냥 부퍼탈 주민들에게 역할을 맡겼다. 이 작품은 미학이 얼마나 시대 초월적인지, 피나 바우쉬가 커플, 인간관계, 공동체에 관해 전한 메시지가 얼마나 보편타당한지, 어떻게 모든 세대가 그 작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 작품은 앙상블 작품에 가깝고 독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비전문가에게 특히 적합하기도 했다.
피나 바우쉬는 모든 것에 확실함이란 없다고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시작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전혀 몰라요. 그것은 그저 두려움만은 아니에요. 뭔가 아주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희망이기도 하답니다."
나는 사람들이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라고 피나 바우쉬가 밝힌 바 있다. 작품들에서 희극성이 비극성과 번갈아 나오며, 그럴 때면 유머가 종종 고통스럽고 잔혹한 장면들을 비로소 견딜 만하게 해 준다. 그녀에게는 항상 정서성이 매우 중요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지루해지죠. (...) 명랑성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작품에는 언제나 그 반대도 있답니다. 그것은 조화를 추구하는 것과도 약간 연관이 있어요. 그러나 희극성은 그녀에게 무조건 필수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우울한 단계가 오히려 명랑한 작품들을 낳고, 평온한 시기는 되레 절망과 슬픔을 강화하더라고요. 원한다면, 일종의 균형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136쪽.
1980년 남미 순회 공연중에 그녀는 남편을 만나고 1981년에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1983년에는 에센 폴크방 대학교의 무용과 학과장 직위를 넘겨받게 된다. 어머니와 교수로서의 추가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피나 바우쉬는 놀랍도록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다. 1980년대 전반부터 탄생한 작품들을 탄츠테아터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에 속한다. <넬켄Nelken(이하 카네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상연되었으며, <1980>과 <산에서 통곡소리 들리라니>는 탄츠테아터 장르를 명료하게 보여 주는 모범 사례다.
<카네이션>은 1982년 말에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되는데, 남미 순회공연 중에 칠레에서 보았던 카네이션 들판이 피나 바우쉬에게 종이 카네이션으로 이루어진 무대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꿈속 풍경 같은 효과를 낸다. 이 작품은 탄츠테아터의 첫번째 전성기에서 가장 밀도 높고 감동적인 작품에 속하며, 따라서 레퍼토리에서 자주 발견된다.
<카네이션>에서도 여성복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거듭 여성 옷차림으로 춤을 춰 보이면서 테이블 위 노출된 여성들을 자리에서 밀어낸다. 그러자 여성들은 테이블 밑에서 계속 춤을 출 수 밖에 없다. 억압을 말없이 작동한다. 단정했던 카네이션 들판은 쑥대밭이 되고 무용수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억압 앞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무너진다. 한편 자극 적인 볼거리를 끝없이 요구하는 관객은 무대 위 공연자의 존엄에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그 상황을 관객에게 친절히 일깨워 줌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낙원에서는 사랑은 커녕 소통조차 어렵다. 바우슈의 작품은 무용이지만 춤이 별로 없다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카네이션>은 통속 드라마에서 클리셰를 모두 걷어낸 후의 잔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 두려움과 외로움, 남녀 간의 폭력, 인간에 대한 억압, 소통의 어려움 등은 피나 바우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이 작품은 무용수가 아니라 인간을, 동작이 아니라 삶을 보여준다. <카네이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들을 무대 앞으로 나와 한 줄로 서서 자신이 왜 무용수가 되었는지 말한다. 공연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의 언어로 더듬더듬 건네는 말에서 관객들은 캐릭터가 아닌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신체가 하는 것의 일부는 다른 사람, 혹은 한 무리의 타자들의 신체로 스스로를 열어젖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신체는 스스로 닫혀 있는 실체가 아니다. 신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자신 밖에 있고, 자신의 환경을 탐험하거나 항해하면서, 감각을 통해 확장되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감각을 통해 박탈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존재라면, 혹은 우리의 촉감, 운동성, 촉각, 시각, 후각, 청각 능력이 우리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면, 이는 신체가 자기 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고 이런식의 박탈이 더 일반적인 신체적 감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에 결집한 신체들이 신체의 사회적 연대를 단언하고 있음은 전혀 놀랍지 않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세계를 실행하거나 우리를 죽이고 있는 세계들을 거부하는 사소한 방식일 수 있다. 이것이 의도적 노출과 집요한 존속의 형태, 즉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는 동시에 행위하고 있다는 동시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살 만한 삶에 대한 신체적 차원의 요구인 것은 아닐까?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009년, 피나 바우쉬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한동안의 혼란과 애도 후 바우쉬의 아들인 롤프 살로몬이 피나 바우쉬 재단을 설립하고 그녀를 기리는 프로젝트인 <넬켄 라인>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작품, <카네이션>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계 행진'을 모티프로 한다. 넬켄라인 프로젝트는 모든 이를 행진에 초대한다. 제스처를 자세하게 설명한 동영상의 링크가 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고, 이를 보고 스스로 만든 동영상을 보내면 재단 계정에 공개된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은 모두 다른 상황에서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거장에게 압도되지 않고, 누구나 춤에 합류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녀를 애도하며 우리의 삶도 돌보는 방식이 아닐까. 우리는 넬켄라인에 함께하는 신체들의 사회적 연대로 우리를 죽이고 있는 세계들을 거부하는 동시에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카네이션밭-을 넘나들며 몸에 갇힌 자아를 해방시켜 깊숙한 내면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피나 바우쉬는 참여를 통해서만 찾아갈 수 있는,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두려움을 넘어선 뭔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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