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기억하기 - 선의로 비롯된 공동의 기억을 향하여
<점원>에서 배경이 되는 식료품 가게의 주인인 모리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려고 하지만,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유대인임을 잊지 않으면서도, 인종과 계급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나름대로 매일의 선의를 베풀며 살아간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3센트어치씩 빵을 사가는 폴란드 여인을 위해 새벽 6시에 가게 문을 열고(7-8쪽.), “술주정뱅이 여자”의 딸에게는 외상으로 주고, 없었던 셈 치고(8-9쪽.), 다른 가게에 간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단골 손님에게는 햄을 한 조각 더 준다(38쪽.).
어느날 강도 2인조가 가게에 침입해 모리스는 강도가 휘두른 총에 머리를 맞게 된다. 그때 강도가 한 말은 “넌 거짓말쟁이 유대인이야.”(39쪽.)이다. 모리스 외에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인종과 그들을 구별짓지만, 한편 그런 구별짓기 때문에 이렇게 구별짓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는 가게 문을 열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 강도 중 한명이었던 프랭크를 점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프랭크는 비록 강도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가난함을 즐기고 선행을 베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분 같은 사람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생기는데, 울지 않으려고 그걸 참아 내곤 해요.”(47쪽.) 라고 말할 줄 안다. 그는 비록 나쁜 짓을 했을지언정, 도덕성이나 공감 능력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프랭크에게 모리스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현현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용기’는 모리스가 다쳐서 쉬어야 하는 와중에도 매일 아침 일찍 빵을 사러오는 ‘유대인 혐오자’ 폴란드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에 견줄 수 있다. 또 가진걸 다 주고 가난함을 즐기던, 선하게 태어나는 재능을 지닌 성 프란체스코는, ‘가난함을 알아볼 줄 아는 모리스(52쪽.)’와 무척 닮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선의를 배워가며 자신의 삶의 적용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반성하는 일이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라면 프랭크가 계속 배움과 뉴욕대에 대해 상기하는 대목은 결국 미래를 기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프랭크는 “나 처럼 되지 말게나.” (124쪽.)라고 말하는 모리스로부터 한발 짝 더 성장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의 윤리적 지침을 마련해 간다. 자기 반성과 자아 실현 이라는, ‘제대로 된 삶’을 향한 끊임 없는 추구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이탈리아인의 기질과는 상관 없이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행동을 모방하고 행동을 부추김으로써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가게 된다.
정체성과 인격에 대한 고찰 -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단 한번의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있는가
모리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고, 프랭크는 모범시민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모리스가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며 사는 유대인이라거나, 프랭크는 범법 행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무결한 시민이라고 바라보기 힘들다. 하지만 모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믿으며 프랭크는 자신의 소소한 일탈 행위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인격을 다 설명해줄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는 유대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단지 선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지.”
“나한테는 돼지를 먹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는 않아. 어떤 유대인에게는 중요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지. 가끔 배고플 때 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고, 그 누구도 나를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일 내가 율법을 잊는다면, 그들은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거고, 난 그들 말을 믿겠지. 그게 의미하는 바는 옳은 일을 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사는 거야.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지. 우리 삶은 충분히 힘들어. 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야만 하지? 자네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잘돼야 하잖아(……).” (184-185쪽.)
랍비는 기도서를 내려다 봤고, 그리고 다시 눈을 들었다.
“유대인이 죽을 때, 누가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묻습니까? 그는 유대인 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한테 와서 ‘랍비, 만약에 비유대인들하고 같이 살고 일하며 그들에게 우리는 먹지 않는 돼지고기와 트레이페를 팔고, 20년 동안 한 번도 회당에 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유대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지, 모리스 보버는 내게 진정한 유대인이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의 경험을 기억하며, 그 안에 살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대진의 심장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이야.’ (……) 그는 고통받았고, 참아냈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가졌습니다. 누가 저한테 말했을까요? 저는 그냥 압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는 아주 조금만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는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원했죠. 그러한 이유로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338-339쪽.)
하지만 “자네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잘 돼야 하잖아.” 라고 말하던 모리스는 프랭크가 저지른 실수들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배제하기 시작한다. 프랭크는 솔직해지려고 했으나, 계속 망설이다가 진솔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쁜 결과를 만드는 선택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는 굳건했고,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 증명할 기회를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일 사람들이 이제 나를 체포하면 어떡하지?(예전에 모리스에게 강도짓한 이유로) 내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됐는데도? (212쪽.)
프랭크는 생각했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는 없어. (매상에서 1달러를 훔쳤다가 다시 갚아 나가려던 중에 모리스에게 들켰을 때) 난 이제 다른 사람이잖아. (241쪽.)
프랭크는 계속 내적 갈등을 겪으며 스스로에게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 오해의 벽을 쌓아간다.
백만 가지 말들이, 그중 일부는 엄청난 말들이, 가슴속에서 올라와 목이 메었다. 매일 그 말들이 죽어 갔다. 그는 끊임없이 탈출을 생각했지만, 그건 그가 언제나 했던 거였다.- 도망치는 일.
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죽어야 끌어낼 수 있을 터였다. 벽이 안으로 무너지면 삽으로 그를 파내야 했을 것이다. (285쪽.)
프랭크는 모리스가 폐렴으로 입원하고 모리스의 가족이 파산하는 걸 막기 위해, 이전의 불안하고 충동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버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마음 먹은 그는 송판에 장미를 새겨 헬렌에게 건네지만, 호의는 거절 당하고 장미는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래도 그는 모리스가 죽은 후, 무덤에서 모리스의 삶을 온전히 이어 받게 된다. 마치 빙의한 것 처럼. 혹은 부활하듯이.
그러자 무덤 파는 사람들이 무덤 주위의 무른 흙을 밀어 넣기 시작했고, 흙이 관에 떨어지자 조문객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
헬렌이 장미를 던졌다.
프랭크는 무덤가에 가까이 서 있다가, 꽃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보려고 몸을 숙였다. 균형을 잃었고, 팔을 휘둘렀지만 결국 떨어져 관 위에 섰다. (341쪽.)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가게 안에서 등록기의 둔탁한 벨 소리를 들었고, 식료품점 주인의 관에서 춤을 췄던 사람임을 알았다. (342쪽.)
모리스의 장례식 이후로 프랭크는 가게 뒤편에서 살며 다시 버틴다.
옷이 다 해졌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샀다.(……) 그렇게 그는 버텼다. 하지만 그는 이다에게 방값 주는 건 절대로 거르지 않았다. 헬렌이 가을에 야간 대학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만일 그가 이다에게 90달러를 주지 않으면, 헬렌은 자신이 필요한 걸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355쪽.)
이제 그곳에서 과로로 힘이 없고, 마르고, 불행한 그를 보았기에 그녀에게 짐이 생겼다. 누구를 위해 그가 일하는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 덕분에 그녀가 밤에 학교 다니기에 충분한 돈이 있었던 거다. (358쪽.)
이렇게 버텨가던 프랭크는 마침내 헬렌에게 모리스가 자신을 오해할 수 밖에 없었던, 미루었던 자신의 잘못들을 진정성 있게 고백했고, 헬렌은 이렇게 어느날 문득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이야기의 초반에는 모리스의 은유처럼 등장하였다가, 이야기의 후반에는 모리스가 된 프랭크를 상징하는 듯 등장하여, 헬렌이 쓰레기통에 버렸던 목각 장미를 진짜 장미로 변화시키고 사랑하는 이에게 대신 장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에 프랭크는 예전에 힘겹게 읽던 책을 기분 좋게 읽으며 어떤 부분은 자신이 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들은 그대로 읊조리며 살던 그는 이제는 조금씩 그 이야기를 변형할 줄 알게 되며,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찾게 된다.
그는 보편적 윤리적 삶에 가까워지면서, 사랑도 이루게 된다.
“어린 소녀여, 여기 어린 소녀를 위한 장미를 받으세요.” 그녀는 장미를, 프랭크 알파인의 사랑과 기원이 담긴 장미였음에도 받았다. (362쪽.)
<점원>에서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는 스쳐가듯 등장하지만, 프랭크라는 인물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준다. 결국 프랭크는 자신의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삶을 사는 것'을 추구하며 동경하던 성 프란체스코와 모리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인격을 고양한다.
헬렌의 희망 - 미래에 열린 가능성들을 잊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 그리고 사랑
이 책의 주요 화자는 모리스와 프랭크이고, 그들의 관계와 대립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계속 언급되는, 헬렌의 삶에 대한 고민과 태도에서 나오는 그녀의 메세지를 보며 작가는 다음 세대와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을거라 생각된다. 그녀는 “지갑을 열고, 봉급을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며”(29쪽.) 모리스를 구원하고, 대학 졸업까지 프랭크를 부양할 계획을 세우거나 그의 선물까지 학비에 보태라고 거절하며 구원할 의지를 보였던 헬렌은 꿈꾸던대로 미래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 때문이다.
헬렌은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늘 한발 더 나아가 더 나은 미래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모리스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 무얼 준 게 있지? 심지어 대학 교육도 내가 뺏어 갔잖아.”
“그건 제가 결정한 거잖아요. 하지만 어쩌면 갈지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
“저 스스로 저한테 줄 거예요.”, “그런 희망이 있죠.” (32-33쪽.)
“난 좀 더 크고 나은 삶을 원해. 내 가능성을 되찾고 싶다고.”
“교육, 장래, 내가 원했지만 한 번도 갖지 못한 것들.”
“남자도.” (65쪽.)
그녀는 먼 곳에 대해 열심히 읽었지만 삶은 집 근처에 머물렀다. 찰스턴, 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자신이 들어 봤던 도시에 갈 수만 있다면, 많은 걸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맨해튼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광활한 세계에서 그만큼만 갔고, 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 평생을 살아온 곳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건 범죄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야기로 인해 그녀는 조급해졌다. 여행을 하고, 경험을 하고, 제대로 삶을 살고 싶었다. (156쪽.)
헬렌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프랭크를 위해서도 막연한 계획을 세워보게 된다.
프랭크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좀 더 가치 있는 야망을 실현하려고 애썼다. (……) 프랭크는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았고, 좀 더 심오한 잠재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그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 되길 바랐고, 대학 졸업까지 그를 부양할 계획을 세웠다. (198쪽.)
이렇게 주체적인 여성인 헬렌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 부모로부터 결혼의 압박을 받으며, 연애도 잘 되지 않고, 뉴욕대 야간반이라도 진학하길 꿈을 꾸며, <돈키호테>와 <백치>를 읽기만 한다. 그래도 그녀는 남자친구 였던 냇과 점점 사랑을 느껴가던 프랭크 사이에서 남자들에게 선택권을 넘기지 않고, 신중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낸다. 좋은 문학을 가까이한 덕분에 생긴 분별력일까.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결심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기에 갑자기 인생이 엉망이 된다는’(160쪽.) 이 모든 인간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가까이했던 그녀이므로 그렇게 계속 읽어가며, 제대로 삶을 사는 길에 점점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사랑을 결심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면 갑자기 인생이 엉망이 된다는' 것도 잘 알았기에 끝내 사랑도 지켜낼 수 있었다.
<점원>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선의와 공동의 기억을 통해 서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지만, 그 후에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 정체성에는 완전무결하지 않은, 불순물이 있을 수 있으며, 우리는 한 사람의 과오가 스스로 성장하려는 의지를 뛰어넘을 수는 없음을 이야기를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희망을 건네며, 그 희망을 때론 대신 짊어지려는 행동이 얼마나 숭고한지도 깨닫게 된다. 그 숭고함은 희생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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