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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컴플렉스님의 서재
  • 별의 시간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11,700원 (10%650)
  • 2023-02-25
  • : 3,177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 영원을 생각하며 순간에 몰입하기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법을 몰랐다. 누군가 안타까워 하며 그녀 대신 비명을 질러 주고 싶어했던 연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통해 '삶의 선고'를 받았다.
목소리 없는 그녀는 사라지고, 말을 하고 행위를 하는 그녀로 탄생하였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고집스러운 난쟁이 족, 그러니까 언젠가 비명을 지를 권리를 되찾게 될 족속의 일원' 임을 알아차렸다.
월급을 타면 장미를 사는 그녀는 삶을 사랑하지만 삶을 제대로 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애인도 빼앗기며 수동적으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누군가의 선택의 결과만 누리는 삶이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카프카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같은 유대인이기도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어쩌면 책 제목으로도 고려했던 ‘비명’이라는 말에서 카프카의 ‘투쟁’을 연상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월급을 타면 장미를 사는 마카베아- ‘월급’과 ‘글쓰기’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사이의 갈등을 견뎠던 카프카처럼 주인공 마카베아도 사실은 투쟁중이기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가 되지 못했기에 그 비명은 외침이 되려다 말았다. 소리없는 절규, 들리지 않는 통곡으로. '삶의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무덤 잔디 밑에는 가엾은 마리아네가 잠들어 있네. 소녀들아, 와서 가엾은 마리아네를 위해 울어 주렴. 헤르만 방, <길가에서> (토베 티들라우센, <어린 시절> 중)”

무덤속에 있는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 있었던 존재이기에 흔적으로 말을 한다.

“영원은 단순히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의 몸에 담을 수 없는- 왜냐하면 그녀는 죽을 것이므로- 어떤 뿌리 깊은 확신이었다. 영원을 넘어서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영원이었다. 또한 어떤 절대적인 느낌, 거의 추상적인 순수함 역시 영원이었다. 그녀에게 진정으로 영원성을 느끼게 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건 훗날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그녀의 육신을 계승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현재로부터 유성의 속도로 멀어져 갈 그 육신을.
(……) 영원은 무한히 큰- 그리고 천천히 소멸해 가는- 양이 아니었다. 영원은 연속이었다. 62-63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초기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여주인공 주아나는 스스로 시를 쓴다. 모든 '아니'를 깨부수며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두려워할게 없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아나의 육신은 <별의 시간>의 마카베아 에게로 계승된다.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에겐 저주였던 그 이상한 자유, 그녀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연결시켜 준 적이 없었던 그 자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밝혀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영광의 순간들이 거기에서 나오고, 미래의 모든 순간들 역시 거기에서 창조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316쪽. <야생의 심장 가까이>”

이 책은 언뜻 연약한 존재에 대한 누군가의 애정어린 관찰기 같다. 삶과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고, 비명을 질러주고 있다. 그것은 그 존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그 누구도, 자신 조차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자 같은 존재로서의 행위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면서 삶의 방향은 여주인공과 대척점에 있으며, 그렇게 대칭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관찰자는 여주인공이 입을 열고 말을 하기를 바라지만 관찰자는 오히려 침묵하고 싶어하고, 관찰자는 월급을 타면 각종 공과금을 내지만 여주인공은 장미를 산다. 한편 그 또 다른 자아는 우리가 신을 믿듯이, 삶과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울 때 의식에서 떠오르는 단 하나의 존재, 실체가 없는, 뇌에서 만들어낸 생명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태어난 이상 살고, 견디게 해주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자아 혹은 신은 관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신이 관찰하는 여자는 믿음 자체로 족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가끔씩 은총 안에 머물 수 있었다.

재채기가 나오면 감기에 걸렸나 보다 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고 가슴이 두근 거리면 사랑에 빠졌나보다, 하는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가 우리를 돌보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돌봄을 하지 못해도 그것을 해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람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이 자신에 대한 인식보다 더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타인은 그 존재에게 기꺼이 다가가 대신 돌보아 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아의 위안을 넘어서는 모두의 위안의 행위가 아닐까.

‘그래’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래’로 끝나지만, 중간 중간 ‘아니’의 저항에 부딪힌다.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맛없음을 맛보고, 편안한 느낌을 포기하는 행위로. 행복? 그보다 멍청하다고 여기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며. 삶에 대해 추구하는
‘그래’의 가치들은 ‘나’로 향하게 된다면, ‘아니’의 가치들은 타인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것을 ‘용기’라고 말한다. 특정 사회 계층에 속하지 않은 열외자로서.

삶은 버튼만 누르면 삶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는 것인데, 화자는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모르는 그녀에 대해 글을 쓴다. 이미 나에게 업힌 이상 나의 어깨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 타인의 존재감을 그렇게 감당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나빠진다 해도 자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고 자신이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녀가 목적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화자는 월급날에 각종 고지서를 처리하기보다 장미를 사는 그녀의 행위를 칭송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겁에 질리고, ‘나는 나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지만, 꽃을 사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순간에 응답하는 그녀를.

그러나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자기 삶이 원래부터 그런거라고 받아들여 왔었다. 사랑에 빠지고 음악을 알게 된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감성들과 더욱 섬세하고 우아한 삶들, 심지어 영혼의 사치라 부를만한 것들마져도, 그렇게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광활한 음악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였던 그녀는 이렇게 갑자기 용기가 솟아서 자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녀의 대화는 늘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한 말(=비명?)을 사용한 적이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랑‘ 조차도 ‘나는-뭔지-모르겠는-것’이라고 부르는.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녀 역시 자살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삶이란 버터도 바르지 않은 오래된 빵보다 더 맛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녀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따끈한 수프를 먹이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싶어 한다. 삶이 라는 커다란 사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연인 올림피쿠가 마카베아 에게 해준 일은 “그녀가 해고 당하면 금속 공장에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한 것”일 뿐. 결국 자신이 원하는 걸 무엇인지 잘 아는 올림피쿠는 일등품 글로리아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우는 법 조차 잊은 마카베아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그러가 세상을 연결하는 끈인 올림피쿠와 그의 새애인 글로리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결국 올림피쿠를 용서한다. 그도 오지 출신의 수난자였기에.

또한 자신도 수난의 연속인 삶을 살던 마카베아는 저주도 풀어 준다는 마담 카를로타를 찾아가게 되고, 그녀로부터 '삶의 선고'를 받는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멋진 운을 따라가봐.”

마카베아는 마담 카를로타가 그녀의 삶에 대한 모든 걸 알아맞힌 뒤-마치 죽기전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열정이라고 불리는 걸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거센 충동에 휩싸여 마담 카를로타의 뺨에 입을 맞춘다. 마카베아는 비로소 자신의 삶이 비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늘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진실하게 직면하며.

“‘말’이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아,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그건 이득이 되는 상실이었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듯 점쟁이로부터 삶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원양 여객선만큼 거대한 메르세데스 벤츠 차가 그녀를 치고, 아이러니하게도 붉고 진한 피를 흘려가던 그 순간, 그녀는 새로 태어난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집스런 난쟁이 족, 그러니까 언젠가 비명을 지를 권리를 되찾게 될 그 족속의 일원이었기에. 그녀는 오늘이 내 인생의 첫날이라고 생각한다. 136쪽.<별의 시간>“

죽음에 이르러 미래를 이야기하는,
나와 타인뿐 아니라 내가 온 세상과 연결된, 공기에 마저도 나의 흔적이 어린,
다시 태어남과, 돌봄, 순환,

그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이야기는 야생의 심장(중심)가까이 에서 별의 시간으로-
첫 소설과 구조가 대칭적으로 닮아 있으면서도, 마지막 소설에서는 나에서 타인으로, 중심에서 우주로, 현재와 영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더욱 세계관을 확장한다.

“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틈새의 하얀 모호함.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 조용히 죽은 채로 드러나는 삶의 본질, 한 조각의 영원.
어쩌면 삶의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가르는 건 고요한 찰나인지도 모른다. 250쪽, <야생의 심장 가까이>

나 역시 이런 저런 실패 끝에 나 자신으로 축소되었으나, 적어도 나는 세상과 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 젊은 여자와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산다. 그건 언제나 영원히 오늘이기 때문이고, 내일이 오늘이 될 것이며, 영원은 바로 이 순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29-30쪽. <별의 시간>”

영혼의 사치를 누리며 삶의 사치를 발견해가며,
삶은 영원으로 남을 순간의 연속이기에.
'아니'를 해도, 결국 '그래'로 남기에.
'그래'는 '아니'를 넘어선 용기이기에.
그 용기는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 카프카가 찾기를 원했던 힘의 평행사변형을 구성하는 두 힘의 작동으로 생긴, 제 3의 힘, 대각선의 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딸기철에는 피로로 소진되지 말고, 딸기를 사먹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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