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신의 유해는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아산 선영에 안장하였다. 순신의 상여가 지날 때에 백성들은 길을 막고 통곡하였다. 왕도 어려운 한문으로 제문을 지어 조상하고 우의정, 선무공신 일등을 책하였다. 원균(元均)은 삼등이었고, 권율(權慄)이 이등이었다.
그러나 그까짓 것이 무엇이 그리 긴한 것이랴. 오직 그가 사랑하던 동포의 자손들이 사당을 짓고 춘추 제향을 지내었다. 그때에 적을 보면 달아나거나 적에게 항복한 무리들이 다 정권을 잡아 삼백 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
그가 돌아간 지 삼백삼십사 년 사월 이일에 조선 오백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사람 이순신(충무공이란 말을 나는 싫어한다. 그것은 왕과 그 밑에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에)의 슬픈 일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