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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ry Han님의 서재
  • 시절과 기분
  • 김봉곤
  • 12,600원 (10%700)
  • 2020-05-01
  • : 2,372

 글을 쓸 때, 자기 삶의 파편을 글 뭉치 안에 어느 하나라도 넣지 않을 수 있을까? ‘있을 법한 지어낸 이야기’가 소설의 정의라고는 하지만, 모든 부분을 허구로 지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할까. 글 속에 작가의 모든 삶이 들어있다면. 정말이지 그것은 그것대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김봉곤 작가는 소설집 <시절과 기분> 작가의 말에서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금 거창한 선언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 내내 그가 글을 써야만 했고, 써야만 하는 이유를 소설 안에서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나는 그런 방식에서 먼저 설득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소설들의 테마는 ‘사랑’이다. 사랑의 글쓰기라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시절과 기분> 가제본을 받고 쾌재를 불렀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엔드 게임’이 수록된 가제본이기 때문이었다. ‘엔드 게임’의 화자는 ‘나’이며 헤어진 연인 형섭과의 이야기―실제로 김봉곤 작가의 전작 <여름, 스피드>에 수록된 ‘컬리지 포크’에 형섭과의 이야기가 있다―를 글로 써 등단한 김봉곤이다. 형섭을 잃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그를 잃지 않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었다고도 생각하는 ‘나’는 형섭과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 아직 이별하는 중이다. 각자의 일상을 보내면서 나누는 대화와 문자들, ‘나’가 복기하는 그와의 지난 시절들, 그리고 그에 대한 마음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응시하는 ‘나’의 다짐이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표현돼 있다. 형섭과의 이야기를 써야만 하는 소설가 ‘나’를 화자로 내세운 김봉곤 작가의 사랑을 가늠해보고 있자면 내게 그 사랑은 어떤 기분으로 다가오고 만다. 내 시절도 그랬었고, 다른 시절조차 그렇게 다가오겠지. 망막하고도 막막한, 어쩌면 안도하기도 하는 기분.

 

 김봉곤 소설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인물이다. 사랑의 권력 차에 따라 우리는 얼마나 한없이 냉정해지고, 비굴해지기를 자처했던가. 사실 우리가 더 사랑했든, 덜 사랑했든 열정에 관한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김봉곤의 인물들은 한 번 더 눈길이 가고, 짠하고 찌질해도 애착이 간다. 1g이라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의도적이었든 실제로 작가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든 둘 다이든 무슨 소용일까. 독자로 하여금 사랑의 시절에 동참하게 하는데.

 

 표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화가 Henry Scott Tuke의 ‘Leafy June’이라는 작품을 가져왔다. 김봉곤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며 확정된 표지 시안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났다.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다. 늦봄과 초여름의 사이에 있는 지금에 걸맞은 초록의 향연. 김봉곤 작가가 팔레트에 십수 개의 서로 다른 초록빛 물감을 짜놓고, ‘저 이런 색 써요.’라고 말하는 상상도 해버렸다. 첫 소설집은 여름, 두 번째 소설집은 봄. 그럼 세 번째는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엔드 게임’의 선언과도 같은 마지막 문단을 소개하며 끝을 맺겠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다. 내 부끄러움에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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