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이 책의 제문이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에 가슴에 훅 들어오더니,
완독 후에 다시 보니, 더욱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책의 내용을 온전히 압축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딸기를 좀 안다고 모든 과일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우를 꼬집고 있어, 이런 우를 범했던 한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뜨끔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결정되어 있는 세상에 내던져진다. 불확실하고 개방적인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어딘가 소속되기를 원한다. 아기가 엄마한테서 분리불안을 느끼듯이 현대인은 다른 사람들, 문화, 사회에 대해서 분리감, 고독감의 공포를 느낀다. 이런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합일을 이루려고 한다. 작가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상황, 인간의 실존 조건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또 다른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유롭고 싶지만 그렇다고 대중과의 분리는 원하지 않는, 대중과의 일치감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의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화를 원하지 않는 대중은 대량 생산품처럼 표준화된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알코올, 도박 등의 중독 상태에 쉽게 빠지며 일상적인 오락과 노동에 매몰되는데, 이러한 합일은 일시적일 뿐이다. 궁극적인 합일의 방법은 인간적인 결합, 바로 '사랑'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많이 소비하고, 취미도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군중과 함께 있으며 안전을 도모하고,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차이가 별로 없다. 이렇게 오락의 규격화, 기계적 작업, 노동의 규격화로 인간은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합일을 이루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피상적인 합일과 욕망을 해소하는데 집중하는 현대의 인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보이는 인간의 상과 유사해 보인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현대인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랑의 문제는 보통 대상을 찾아내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활동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기술을 배워야 하듯이 사랑도 배워야 한다.
저자는 사랑도 기술이므로 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이해하고 반복적인 훈련, 정신 집중,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훈련엔 자기 자신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정신 집중은 남과의 관계에서 경청을 잘하며 개인적으로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홀로 있는 것이야말로 사색의 힘을 키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된다. 또한 정신 집중 훈련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야말로 성숙한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과 분리를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 개인의 특성도 유지시킨다. 사랑은 두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게 한다. 사랑은 주는 활동이므로,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 있는 활동이며, 그 활동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를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최고의 사랑, 가장 이상적인 사랑인 모성애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사랑은 '보호'를 동반하며,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책임'이 따르고, 다른 존재가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존경'을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람을 잘 알려는 욕망과 관련된 '지식'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해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사랑을 감상적으로 하게 되면, 우상이나 스타를 숭배하게 되거나, 드라마 등의 상품 속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 합일, 친밀감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이러한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된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랑은 과거 지난날의 사랑이나 미래의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또 하나의 오류는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실재 진짜 갈등을 회피하면서 생기므로, 갈등은 은폐하거나 투사하지 말고, 명료하게 하여 서로에게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힘을 갖게 만드는 것이 좋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반드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의 문제인가? (...)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무엇보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저자의 신앙에 대한 정의가 좋았다.
비합리적 신앙은 어떤 권위자의 의견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것이지만,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사고력, 관찰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 신뢰성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사랑을 작용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고, 사랑은 말도 행동도 보여줘야 한다고, 수없이 들어오긴 했다. 이 명저에서 이론상 확립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철학이 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출간되고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유효한 삶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 책이 사랑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깨우침을 주고는 있지만, 현대 물질 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알아도 실천 못하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한번씩 일깨워 줄 스승이 필요하다. 이 책을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