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책날개에 쓰여진 문구이다.
이처럼 이 소설을 잘 말해주는 문구가 있을까.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을 때, <칼의 노래>를 읽긴 했는데 그 땐 좋은 줄 몰랐다.
독서력도 붙고 감성도 말랑해져서 그런지 이번에 읽으면서는 코끝이 찡해지기를 수차례..
문장에 감탄하고 이순신 장군의 온화함과 치밀함에 감탄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이 화자로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난중 일기>는 읽어보지 못했으나 웬지 이 소설이 현대판 해석 난중 일기인 것만 같다. 일인칭 서술은 이 소설에서는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전쟁을 이끄는 장군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에선 처연함이 느껴져서 가슴 뭉클하기도 했다. 전쟁 상황 묘사는 또 어떤가. 처참하고 참혹했던 전쟁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쟁 상황이나 전술을 짜는 이 모든 것이 장군으로서 혼자만의 고독하고 엄중한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과 적과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했다. 적이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를, 왜 칼을 차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했고,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자연사로 생각했고, 나는 적의 적임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적의 고통마저도 사유거리였다. 적의 개별적인 고통, 죽음을 위로하고 설명한다면 어찌 전쟁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음의 개별성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다잡았다.
다른 소설이나 에세이에서도 느꼈지만 김훈 작가를 살아숨쉬는 힌 문장의 역설의 대가라고 말하고 싶다. 게다가 운율까지 시적이어서 낭독하면서 읽기에 너무 좋다. 역설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너무 많지만 몇개만 발췌해 본다.
"적은 커서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으나 거대했다"
"적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적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 적들은 달려들 듯이 무너졌고, 기를 쓰고 무너져나갔다."
"물 위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서, 내가 적을 발견하면 적이 나를 발견했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죽음과 삶이 명석히 구분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칼의 노래> 하면 첫문장을 뺴놓을 수가 없다. 김훈 작가는 기자 시절부터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어휘 하나하나에 어휘 순서에도 조사 하나에도 고심했을 작가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을, 특히 바다를 묘사하는 문구들은 은유적인 표현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름다운 운율로 묘사하여 마치 시를 읽는 듯 하다. 첫문장 첫단락은 외우고 싶을 만큼 좋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한 챕터마다 제목이 있어서, 스토리를 떠나 한편씩 하나의 에세이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 중에 "밥"이라는 챕터의 첫문장은 끼니의 철학이 녹아 있다. 전쟁터에서 끼니 해결이야말로 어려웠을 것이다. 농민들은 모두 피난가거나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가 있는데다가 조정에서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해 식량 조달은 어려웠다. 전쟁터 끼니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통제사로서의 이순신의 고민은 먹을 것이 없어서이지만, 주부의 입장에서 읽다보면 매끼니를 준비하고 책임져야 하는 고민으로도 읽혀졌다는... ^^ 이순신의 고민이 주부의 애환과 닮았다! 뭐 무엇을 느끼지는지는 독자의 몫이니깐. ^^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전술을 세우는 모습에서는 치밀함이 느껴졌다. 배신자나 국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엄혹했고,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온화했다. 그동안 무수히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김훈의 소설을 읽고나서야 새삼스럽게 느껴진 바가 크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백전 백승의 신화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등등. 한문장 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첫문장을 읽어보면서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몇 문장들을 옮겨본다.
"강물에는 파도가 없어서, 배는 비단 이부자리를 깔고 나아가는 듯했다"
"살아 있는 아픔이 살아 있는 몸 속에 박혀 있었으나 병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병은 아득한 적과도 같았다. 흐린 날들의 어깨 쑤심증은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적의 생명으로 느껴졌다"
"갑판 밑에서 노를 잡던 적의 격군들이 물 위로 쏟아져내릴 때,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
"적도 오지 않고 명의 수군도 오지 않는 동안 백성들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다시 피어난 백성들은 저절로 피어난 것만 같았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 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