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형태의 문화와 예술을,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느끼며 살아가자고 다짐했지만 내가 즐기는 주로 즐기는 문화는 여전히 영화와 간간히 읽는 문학 작품들뿐이다. 어릴 때부터 화가들과 그들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동경했지만, 그저 동경했을 뿐 거리를 좁혀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단 나는 미술을 못했다. 난 흔히 말하는 똥손 그 자체였고 그래서인지 평가받는 게 무서워 나중엔 미술 시간 자체를 기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미술 선생님이 굉장히 아이들을 차별하는 분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아무튼 꼭 내가 잘 그려야만 미술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닌데, 사춘기의 나는 ‘미술은 나랑 안 맞아’라고 단언해버렸다. 그리는 걸 포기하면서 보는 것도 포기해버렸고, 그 후로 미술을 즐긴다는 건 왠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영화관에 가는 건 쉬운데 미술관에 가는 건 어렵다. 미술관에 가려면 미술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 같고 보는 눈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근데 그럼에도 어색해서 도슨트 투어 같은 건 신청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왕왕 쫄보인 상태로 미술과의 거리를 매일 벌려가던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내가 사랑한 화가들>이라는 책을 만나면서 말이다.
<내가 사랑한 화가들>은 도슨트계의 유명한 스토리텔러, 정우철 도슨트가 집필한 책으로, 그가 사랑한 화가 열한 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알폰스 무하, 프리디 칼로, 폴 고갱 등…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만나본 이름들에 담긴 사랑, 열정,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스쳐 지나갔던 그들의 그림을 다시 오래도록 쳐다봤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시험지에선 발견하지 못했던 인물들의 표정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작은 감동이 일었다. 아, 여기서 이 사람이 행복해하고 있구나. 슬퍼하고 있구나. 그래서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머리가 탁-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분명 이 책에 담긴 그림들을 어디선가 보긴 봤다. 교과서에서, 시험지에서, 지나가면서, 인터넷 어딘가에서. 그래서 누군가 그림을 보여주면 “아, 이거 어디서 보긴 봤어. 알긴 알아.”라고 답했는데 알긴 뭘 알아…? 난 정말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정우철 도슨트는 “그림은 화가의 언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의 슬픔을 기쁨을 사랑을 절망을 표현하는 온갖 언어들을 봐놓고도 그냥 대단하다고, 신기하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뜯어보는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림 안에 들어가 볼 생각은 왜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왕 보는 그림, 앞으론 제대로 즐겨보기 위해 부끄러워말고 전문가들의 정보를 열심히 주워 들어보자 다짐해본다. 다음에 미술관에 가면.. 도슨트 투어를 꼭 신청해봐야지.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가. 스스로 글씨를 읽고 있는 중인데? 이상하게 누군가 나에게 글을 읽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근하고 친근한 글 때문인지, 내가 책을 읽어나간다는 느낌보단 정말 친절한 안내를 받는다는 느낌이 더 컸다.
미술, 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다, 어색할 수도 있겠다. 걱정했는데,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정말 재밌었다. 작품의 의미나 테크닉, 역사 같은 것을 냅다 해석해주는 책이었다면 눈이 빙빙 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한 화가들>은 그림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듯한 느낌이 더 강해서 가까운 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위대한 화가이자 평범하고 꿋꿋한 사람이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스치듯 봐온 익숙하지만 먼 그림들 속에서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고 싶다면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