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은 클레멘트 코스의 기적을 이룬 얼 쇼리스 박사가 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와 코스의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서도 밝히듯 우리나라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진행했었다고 한다,
옮긴 이에 반가운 이름이 있다.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계신데,그분의 강의는 한번은 도서관 학교에서 한번은 직접 모시어 마을 공동체 강의로 진행했었다.
그때는 줏대있는 부모로 사는 것의 주제로 진행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에 웃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깨는 책이다.
인문학하면 인간들중 성찰 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이 된 지성인이 주로 배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하는 얼 쇼리스 박사의 생각은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이다.
나조차 인문학=지성인 이라는 틀에 박힌 생각으로 읽저 읺았난 생각이 되면서,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보다 옮긴이의 말에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저는 교수님들이 이책을 매우 어렵다고 해서 읽기 전에 많이 긴장했어요.하지만 오늘 워크샵에 읽지도 않고 참석 할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할수없이 책을 잡았지요. 그런데 저는 책이 매우 쉽게 읽혔어요. 그리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런지 말이죠. 제 생각에는 2장부터 10장까지 의 내용은 사실 교수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런 이책에서 제시한 빈곤이나 가난,무력,폭력등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개념들이 교수님들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그런 내용이 반복되면서 지루함을 느끼셧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내용들은 빈곤 '안'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낯선 개념일 수 없으며, 그래서 흥미롭기 조차 했어요. (p.40)
얼 쇼리스 박사의 클레멘트 코스의 기본 취지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 그것은 대화 가운데 존재하며, 대화는 '가난한 이들도 인간이며,그들의 인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존중하는 방식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민으로서 대우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p.38) 고 밝히고 있다.
그는 왜 가난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지,가난이 파생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문제를 직시하는 것으로 클레멘트 코스의 필요성과 기존 취지를 설명한다.
만약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인들이 선택한 이 단어가 적절하고 사회과학자들의 이론이 정확하다면-표면적으로 확실하게 그렇게 보이는 -현대사회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편집자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랩햄은 그답지 않게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런 글이 쓴적 있다."캐비어를 먹는 한 사람이 잇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 ".... 그는 승자와 패자,현대 세계의 게임,그리고 미국적인 방식과 같은 극단의 사례를 선택했다.(p.44)만약 빈곤이 분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고, 그것에서 많은 것들이 파생되었다면 ,단순하고 정확한 정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다 사우스 브롱크스 여성들과 마르크스가 옳앗다. 양은 질로 진화한다.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츨의 삶을 발견한 사람으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데 적합하지 않다.(p.55)이제 24번 구역에서는 어떠한 정치 활동도 일어 날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경제가 지배규칙이 된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세계는 경주만큼이나 상대적이며,상대적인 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이것은 인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존종의 모욕이다.게임의 끄트머리에서 중산층과 승자와 맺는 동맹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이들을 빈민으로 규정해버리면 24번 구역에 시기심이 등장한다. 그 시기심에서 소외,증오,그리고 분노가 피어오른다.(p.58)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앉아만 있기만 하면 되는 프랑스식 모델과는 다른것이었다.소크라테스는 글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위채'정치적 삶'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을 융합해 정치를 탄생시킨 것이다.정치적 삶과 정신적 삶은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는 언제난 대화였다. 대화처럼 정치는 한사람만으로 이워질 수 없으며,사람과 사람사이에 펼쳐진 자유 공간, 즉 정치적 공간이 일어난다.(p.65)어떤 집단에 속한 회원들의 행위에 대한 협상이나 정치적 삶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기력이나 폴력 행태의 반응이 정치적 삶을 대신한다. 원시사회의 의식은 정치적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처럼 필요의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무력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삶이란 불가능하다.그렇다고 아리스터텔레스가 정치를 안락한 삶이나, 여가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한건 아니다.더욱이 정치 그 자체가 정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요'라는 중압감은 개인을 행동하는 삶에서 팍팍한 생존의 현장으로 밀어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행복으로 이끄는 습관들이 발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지배당하는 삶을 노예제도와 비교했다.(p.70)만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혁명이 일어날것 같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빈민들에게 닥친 문제는 어떻게 주류 신화를 뒤엎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황금시대를 버리면 그들은 그 신화를 통헤 받던 위안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신화를 계속 붙들고 잇으면 그들은 가난 속에,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해주는 설명이 필요한 채로 남겨질 것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빈곤을 뿌리치고,주류 신화가 옥죄고 있는 이중의 속박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은 영웅적인 모험을 요구한다. 이 모험은 종종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영웅적인 빈민들의 용기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끈질기에 살아남는 것이 신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p.81)힘은 시민의 공적 삶이란 '행동하는 삶'의 결과이며, 힘 그자체가 '행동하는 삶'이다. 정당한 힘은 오로지 이런 행동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늖며,한나 아렌트가 말했들시 힘은 저장될수 없는 것이다. 행동이 그치는 순간 힘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난 이러한 시민의 행동도 힘있는 집단이 서로 동의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적 삶은 아노미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p.131)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시내 중심가의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정치만이 무력의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공적 세계에 참여하여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잇는 능력이 필요했다.그리고 이 성찰적 사고능력이 바로 비지니스 세계에서 말하는 시내 중심사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엇던 것이다. (p.170)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 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잇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와 정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제치려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간의 차이가 제거돼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화를작동하는 '게임의 법칙'은 평등과 동등한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할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려면 가난한 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p.174)인류가 주어진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상테에서 벗어나 '자치'를 실행하기 까지의 과정에서 정치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자기 통제'의 개념에서 추적해낼 수 잇다. 자기 통제'라는 개념속에서 인문학,평온함,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어려움들을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것 등과 같은 뜻들이 담겨잇다. '자기 통제'는 무력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수단이며,진정한 '힘'에 대한 정의이고,인간다움 그 자체다.(p.198)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릎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