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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경님의 서재

기억이 너무 큰 자발성을 갖게 되면 사람이 버티지 못한다
사람을 버티지 못하게 하는 기억은 주로 감정적인 것, 기분의 이상, 충동, 공허, 허기, 고독, 불규칙성, 일회성, 왜곡, 맹점 등이다. 그것들이 모두 소위 과거의 정상 상태에서는 스스로 해결하고 위치를 지정할 수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에,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 병자들은 특히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기억들은 고유의 좌표를 갖지만 상호 연계되지 못한다. 특히 어떤 감정과 기분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다른 폭발의 연쇄로 이어져도 그 사이의 맥락이 금방 소거되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맥락 없이 치솟는 감정만 느낄 뿐, 기억으로 유의미한 흡수와 축적을 이루지 못한다.
정신병과의 난전에서 기억을 바탕으로 싸우던 이들에게 기억에 결함이 생기면 결과적으로 가장 유용한 창과 방패를 모두 빼앗긴 셈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을 시작한다. 가장 쉬운 접근은 일기다. 그러나 일기를 쓰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일기가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록법이라는 것을. 혹은 일기라는 단어에 무색하게, 매일을 적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미흡한 도구라는 것을 시차를 두고 깨닫게 되며 그 후로 일기를 굳이 적지 않는다. 일기를 적든, 적지 않든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기가 갖는 단점으로는,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 그들이 이루는 꼴의 지지부진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병자는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는 동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병자의 필력이 달리고 내용이 빤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각이며 오히려 이것은 언어의 문제, 병자들은 자신의 상태에 부합하는 기호와 언어를 가지고자 하나 정합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문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매우 죽고 싶다.’와 ‘의사가 나한테 아빌리파이 30을 줬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병의 초기에 사람들은 으레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 견딜 수 없는 기분, 돌연 폭발하는 충동들을 설명하는 데 곤욕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자신은 지금 역어(譯語)로 말한다는 것. 모든 고통은 번역어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생 이 기분과 고통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을 거라는 점.
그렇다고 해도 정신질환이 있는 이들은 다양한 기록법을 시도한다. 무슨 약을 복용하고 오늘의 복약량은 무엇인지를 단순 메모만 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한 자도 빠짐없이 일어난 바들을 적는다든지. 의사나 상담사와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술해두기도 한다.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든지, ‘오늘의 잘한 일’을 적어놓는 사람도 있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인과관계가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나름의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정상 행동과 이상 행동을 구분할 줄 알며 이상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저질러진 일에 대해 단편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다
단편적으로 이뤄진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혼란스럽지만, 기억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는 점이 병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은 연기할 수도, 감출 수도 있다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을 가장 견딜 수 없어 일부러 위험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질병의 친구들을 만나서 사이좋게 지내거나, 사이좋게 전이될 수도 있다.
정신병은 기존에 흐르던 기억의 물꼬를 막아 어디는 웅덩이를 만들고 어디는 메마르게 한다. 나의 경우 병의 경중에 따라 기억의 풍경이 달라진다. 다만 패턴이 있고, 패턴을 파악하는 것까지는 어려워도 포착할 수는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기록을 통해 기억과 만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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