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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은님의 서재
  • 오늘의 착각
  • 허수경
  • 10,800원 (10%600)
  • 2020-06-09
  • : 80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착각』, 허수경

故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책의 제목이 ‘오늘의 착각’인 만큼, 착각에 대한 산문들이 실려있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비록 백 장이 조금 넘는 가벼운 산문집이었지만, 읽는 동안 잠시 그녀의 시간을 함께 살았다. 시인의 문명 비판적인 산문은 읽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모른 체하던 것들의 부스러기 덩어리를 목격한 것 같았다.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카르마가 따라오는 것일 테다.

태양이 봄빛을 보낼 때쯤 내가 살았던 바다 가까이로 거대한 떼를 지어 떠도는 멸치빛이 나는 좋았다. 집단으로 헤엄치던 것들이 커다란 어망에 걸려 은빛으로 파닥이며 지상으로 올 때 나는 어부의 기쁨에다가 내 마음을 기대야 하는지 아니면 저렇게 파닥거리며 하늘을 날아올라갈 기세인 멸치들이 바닥에 너부러지면서 썩어가는 걸 애도해야 할지 몰랐다. _p.14 「물고기 모빌, 혹은 화어花魚」

가까운 과거에 기쁨엔 기쁨만이 남을 수 없단 것을 깨달은 나는 잠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의 세상살이가 무섭게 느껴져 깨달음이 반갑지도 않았다. 아는 게 힘이었던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게 힘이고 권력이다. 고통을 모르는 것이 진짜 힘이고 권력이다. 좋은 것을 보며 마냥 좋아하지 않는 시선을 가진, 비슷한 온도의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앎에 대한 의지는 태양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몫이다. _p.52「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거대한 세계의 불합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앎에 대한 의지는 세계의 몫이 아니다”, “앎에 대한 의지는 신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몫이다”라고 적어보기도 했다. 미스터 크로우는 태양과 싸우는 인간이다. 강렬한 열에너지를 뿜어내는 별과 싸우다니 미친 소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엔 반전이 있다.

사실 미스터 크로우가 싸우고 있는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세워진 일상이다. 태양이 있는 시간을 태양 너머의 시간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 시에 나오는 대로 “태양빛에 가려져 있던/죽음과 재생의 필름들 속에서/돌멩이 하나의 기원이/우주의 모든 페이지를 펄럭거리게 할 수도 있”게 하고 싶은 것이다. _p.55 「미스터 크로우와 오디세이의 착각」

미스터 크로우의 고독한 싸움은 “존재하려고 하는 싸움의 기록”이다. 누군가 그의 검무를 보고 태양을 이길 수 있단 착각에 사로잡혔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나, 나는 역전을 꿈꾸는 자를 보고 도무지 웃을 수가 없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언제가 그랬기에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가정이 가져온 착각”이 더 어리석게 느껴진다. 침묵을 노래라고 생각한 오디세이의 착각처럼 말이다.

착각을 사랑하는 건 인간의 일이며, 인간은 착각으로 살아간다. 내일이 더 불행할 거라는 착각, 혹은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착각, 혹은 우리가 같을 수 있다는 착각과 같은 것들을 한다. 시인은 날카롭고 이성적이지만, 그녀도 착각에 단숨에 빠져버리는 인간이었다. 그녀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 간의 싸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가장 편해야 할 침실까지 착각의 싸움터로 만든다. 지나버린 폐허 도시의 기억마저도 침실로 끌고 온다.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그녀가 경험하고 고민하며 마주한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막연함을 느낀 시인이었다.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 없다는 느낌.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하나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섬뜩한 것은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데 있다._p.28 「김행숙과 하이네의 착각, 혹은 다람쥐의 착각」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_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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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마저 너무 멋졌다. 시험을 앞두고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시간내어 틈틈이 읽었다. 두꺼운 책은 아니기에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웠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책이고, 산문이고, 시간이었다. 언급한 내용 말고도 좋은 산문이 많았는데, 하게 될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글을 줄였다. 책장에 소중히 꽂아두고,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쯤 또다시 읽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착각 #허수경 #허수경시인 #난다 #난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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