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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우스


저자가 앞으로도 이런 책을 계속 내주셨으면 좋겠다.

열 편의 소논문으로 구성되었다. 일부 이론적 내용은 배경지식이 없어서 자세히 읽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일반 독자가 상식 선에서 읽고 즐길 수 있는 지적인 논의가 넉넉히 들어 있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생각해보고 반성할 거리가 많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342 (이 기사도 책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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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번역 비평을 위하여]


이 가운데, 편집인에 의한 교열 작업은 번역이 출간되기 이전 단계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번역 비평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출판 번역 시스템에서 편집인의 번역 평가 작업은 출판 번역물의 최종 모습을 좌우할 정도로 가장 실재적인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편집인이라는 전문 독자의 번역 평가 작업이기도 하기에 번역 비평의 한 유형으로 자리매김하겠다.

(93-94)


문학 작품을 번역하다 보면 번역 평가 현장에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충실성 개념이 사실은 번역 현실로부터 유리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103)


시장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와 편집자는 상품의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대체로 모험보다는 안전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 논리의 집행자라는 악역을 맡은 편집자는 독자를 등에 업고 가독성 규범을 내세운다. 익숙한 표준적인 문장으로 다듬어 내고, 쉬운 단어보다는 현학적이거나 시적이라 생각되는 단어를 선호하고,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 싶으면 단어의 동일성 유지가 텍스트 작동에 필수적인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다른 단어로 바꿔 놓고, 긴 호흡의 문장은 톡톡 끊어 놓고 짧게 치고 나오는 문장을 보면 불안해하면서 이어 붙인다.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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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과 두 개의 재번역 - 네르발의 [옥타비] 번역 읽기]


원론적으로라면,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탄탄한 문장력을 갖춘 작가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번역가가 그러한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가감 없이 우리의 번역 현실을 직시하면, 오히려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 번역가의 안정적인 모국어 구사는 좋은 번역을 낳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필수 조건임에는 틀림없는 만큼, (…)

(223-224)


출중한 문장력도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만날 때에만 좋은 번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31)


베르만(A. Berman)은 [번역 비평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번역 비평의 절대적 순환 고리를 이야기한다. 비평 주체는 번역가의 번역 기획안에서부터 출발하여 번역을 읽어 볼 필요가 있지만, 그 번역 기획안의 진실에 접근하려면 결국 번역물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평 주체는 번역자가 스스로 밝히는 번역관이나 문학과, 번역 대상이 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개인적 해석 등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그 행위의 바탕에는 절대적 신뢰가 아닌 제한적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번역가가 자신의 번역에 대해 말하고 썼던 모든 것은 번역 안에서만 그 실체를 갖고 또한 그 안에서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번역가 개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번역 주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통찰력에서 비롯된 비평 주체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번역 주체는 그 어떤 글쓰기 주체보다도 더욱 분열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쪽의 문학 이데올로기와 번역 이데올로기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면서, 동시에 저쪽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고민을 살아 냈을 원작자의 고뇌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존재이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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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


사실 읽어서 즐거운 작품과 번역에 적합한 작품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몇 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닫고 나면, 독자로서 즐겼던 작품이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번역하겠다고 나대는 일은 삼가기 마련이다.

(269)


번역 학계의 커다란 화두 가운데 하나가 ‘번역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두 언어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저쪽의 텍스트를 이쪽으로 옮겨 오겠다는 번역 자체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리려는 시도로서, 번역이란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좌절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글쓰기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번역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흔히,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틀 자체라,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존재하고, 이는 상이한 언어의 차이를 넘어 동일한 텍스트 생산을 꿈꾸는 번역의 내재적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이 동일한 논리가 번역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논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이 근본적인 불일치의 공간이 번역 주체가 글쓰기를 수행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 언어가 정확히 포개어진다면 번역 주체가 틈입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이라는 독특한 유형의 글쓰기는 동일성의, 반복의 원칙 위에 서 있지 않다. 번역은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의, 이쪽 문화와 저쪽 문화의 차이로부터, 원저자와 번역자라는 서로 다른 두 글쓰기 주체의 차이로부터 생겨나는 차이의 글쓰기이다.

(270-271)


우리의 언어 체험이 알려주듯, 언어유희의 불변의 원칙은 유사한 소리의 어우러짐에서 생겨나는 독특한 효과이다. 그리고 유사성에 기초한 이 소리의 화음은 언어가 달라지는 순간 무너진다. 그러니 번역자는 새로운 언어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화음을 창조하여 동일한 효과를 내야만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모국어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 봐도 원작의 말장난이 보여 주던 똑떨어진 맛은 나오지 않고 억지웃음밖에 자아내지 못하는 설익은 맛만 난다 싶으면, 결국 번역가는 어설픈 말장난을 만들어 내느니 충실한 주를 달아 원작의 언어유희를 설명하는 쪽을 택하고 만다. 우리가 번역 작품을 읽다가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 김 빼는 번역 전략이다.

언어유희가 작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미미하다면 차선책으로 고려해 볼 만한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하철 소녀 쟈지}에서처럼 언어유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언어유희에 작가의 문학관이 상징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경우라면, 절대로 구사해서는 안 되는 번역 전략이다.

(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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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차이의 글쓰기 - 말놀이 번역을 중심으로]


일회적인 말놀이라고 해서 번역을 생략해도 된다는 앙리의 판단을 베르만이 말한 소위 ‘작품oeuvre’으로 불릴 만한 문학 텍스트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문학 텍스트가 보여 주는 고도의 유기성을 생각해 본다면, 일회적인 말놀이라고 해서 텍스트의 의미 생산과 무관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섣부르다. 말놀이가 일회적이어서 번역을 생략할 수 있다기보다는, 말놀이가 일회적이면 이 요소가 원문에서 담당하고 있는 기능은 말놀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높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역으로, 말놀이의 비중이 높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번역가가 말놀이라는 방식을 피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은 당연히 점점 줄어든다.

(301-302)


원칙적으로는, 번역가의 글은 번역가가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실제로는, 그 공간은 늘 독자 걱정에 여념이 없는 편집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번역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타협의 공간이다. 번역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번역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하나 그 번역에 대해 제대로 들려주지는 못하니, 번역자의 글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로는 수동적이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번역에 대해 암시하고 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319-320)


번역 논쟁

정혜용

열린책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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