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일부인 나를 추슬러 간신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54)
대니 드비토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은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66)
낙하하다
멀리서 발사한 총성처럼 독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다음 것이 들려왔다.
별빛보다도 눈부신 불빛들이 삐걱거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102)
옹기전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183)
뼈 도둑
파씨는 학교에서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통에 매혹됩니다. 그건 번쩍거리는 은빛이고, 산뜻하게 주름져 있고, 청결해 보이는 김을 무럭무럭 내뿜고 있습니다. 내부가 얼마나 따뜻해야 연통이 김을 뿜을 수 있는 것일까, 파씨는 연통으로 빨려들어가서 연통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눌어붙어서 연통의 따뜻함의 일부가 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고 손과 발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214)
파씨의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