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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우스



몇 해 전에 노르웨이어를 공부하려고 그랬다기보다는 만약에 공부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놓고, 공부할 때 초급 수준에서 읽기 좋은 책이 무엇인지 검색하다가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장이 간결하고 쉬워서 공부 삼아 읽기 좋을 뿐 아니라 작품도 너무 좋다고들 했다. 꽤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좋았으면 미국에선 노르웨이어 단어 뜻을 주석으로 달아놓은 공부용 원서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세운 사람도 있다.

http://nelsbok.com/publications/naiv-super/ (미리보기 가능)


그래서 기대가 지나쳤나 보다. 나는 기본적으로 북유럽 문화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미난 요소들을 찾아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스물다섯 살인데 대학생인 것 같다. 자퇴서를 제출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대학생인지 대학원생인지 분명하지 않다('친구' 한 명은 대학원생. 하지만 동갑은 아닐 수도 있다.). 부모 형제와 별다른 갈등이 없다. 일하지 않아도 당장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버는 친형에게 의지할 수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갖고 놀아서 옆집에서 집수리는 잘했냐고 물어보는데 갈등은 없다. 우연히 만난 여자애와 바로 사귄다. 형의 지원으로 뉴욕 여행을 다녀온다. (북유럽 사람들이 즐겨 먹는 물컹한 젤리 과자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농담))


갈등이 없어서 무조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배경과 구체적 상황을 초월하여 마음을 끄는 보편성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설득력도.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리뷰를 찾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위 사이트가 바로 떠오르지 않아 검색하다가 영어로 된 어느 리뷰에서 이 작품을 '히키코모리 소설'이라고 평한 것을 보았다.)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부피가 크지 않고
가격은 1백 크로네를 넘지 않고
여러 번 사용할 수 있고
실내는 물론 실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혼자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도 쓸 수 있으며
나를 움직이게 하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 있는 어떤 것.
(23)
팩스에 적힌 주소로 보건대, 형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메리카에 있었다. 내가 두 대륙을 혼동했나보다. 하긴 둘 다 A로 시작해 A로 끝나는 대륙이니까.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실망스럽다.
아메리카보다는 아프리카가 훨씬 이국적인데. 아메리카보다는 아프리카를 여행중인 형이 있다는 게 더 멋져 보이는데. 그건 마치 은행에 돈이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언제 얼마나 많은 돈이 갑자기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있으면 든든한 것.
아메리카에 형이 있다는 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어느 집이든지 세대를 거슬러올라가거나 촌수를 넓게 따지고 들어가면, 아메리카에 친척 한 명 살고 있지 않는 집은 없다.
(107)
샴푸와 치약 광고의 그래픽도 내 눈길을 끈다. 교육적으로도 큰 효과가 있는 광고들이다. 어떻게 영양분이 머리카락이나 치아 속으로 침투해 손상된 부분을 치유하고 미백 작용을 하는지 광고 그래픽을 통해 잘 볼 수 있다. 제품 사용 후, 머리카락과 치아는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요점이다. 더 나아지는 것. 하지만 음식이나 과자가 춤을 추게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를 보면 화가 난다. 크래커들이 상자 속에서 제 발로 튀어나와 부엌 싱크대 위에서 춤을 추다가 냉장고 속에 있는 허브 치즈를 불러내질 않나, 허브 치즈가 모습을 드러내면 춤을 추던 크래커들이 치즈 속으로 뛰어들어 몸 전체에 치즈를 바르질 않나. 봐줄 수가 없다.
(126)
공항버스가 도착했을 때, 리세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녀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키스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엽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만약 매일 한 장씩 엽서를 보낸다면 부담스럽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경치가 좋은 장소에서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고층 빌딩 꼭대기 같은 곳에서.
나는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리세에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멀어지면서 리세의 얼굴이 거의 안 보이게 되었을 즈음,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났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183)
아버지와는 좀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가 조금만 여유 있게 전화를 했더라면 전단지를 만들어줬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내가 그 전단지를 들고 뉴욕 거리에서 뿌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면서. 전단지에는 미국의 모든 행동,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정신병자 같은 꿈과 그들의 외교 정책과 문화제국주의 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는 선언문이 담겼을 것이라고 했다. A4 용지 한 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아버지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버지 자신을 포함한, 의식 있는 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일종의 교훈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이제 십오 분 정도 후면 비행기가 뜰 것이라고 아버지께 말했다. 선언서는 다음 기회에 만들어도 충분할 것이라고.
(184-185)
누군가가 캘리포니아의 산 안드레아스 단층에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어 올리기로 한 프로젝트이다. 일종의 조각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길이 8미터에 폭 6미터, 그리고 높이 7미터로 지어 올릴 거라고 한다. 재질은 건축자재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다고 알려져 있는 콘크리트가 될 거라고 한다. 총 무게는 6만 5천 톤이 될 거고, 조각품 밑에 건조될 받침대는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고, 콘크리트 구조물은 둘로 나누어 연간 6~9센티미터 정도의 속도로 분리되어 움직여나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4천3백만 년 후에는 구조물의 왼쪽 부분은 오늘날의 알래스카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206)
어렸을 때는 온종일 나무를 탔다. 종종 나무 위에 낮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여름이 되어 나뭇잎이 무성할 때면, 아래에서는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그들과 아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293)
나이브? 수퍼! Naiv.Super.
Erlend Loe / 손화수
문학동네
1996(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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