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필름클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비오는 날, 홍대입구역 어느 패스트푸드점 2층 창가에 앉아 필름클럽을 들으며 버거를 먹던 대학생의 내 모습이다. 그 시절의 나는 자주 그렇게 지냈다. 시선은 창가 밖에 두고, 이어폰을 낀 두 귀로 무수히 많은 팟캐스트를 들으며 시공간을 맘대로 누볐다.
이동진 평론가님이 진행하신 라디오 '이그럼', 그리고 조정식 아나운서의 'FMzine'의 애청자였고, 김혜리 기자님이 출연하는 코너는 당연 내 최애 코너였기에 그때부터 최다은 피디님의 존재도 얼핏 알고 있었다. (에프엠진의 영화 코너는 유독 빨래를 갤 때 자주 들어서, '에프엠진'이라는 말만 떠올려도 마른 옷감의 냄새가 느껴진다.) 그러니 그런 두 분과 임수정 배우님까지 합세해 세 분이 라디오가 아닌 팟캐스트를 하신다는 걸 알고는, 더이상 개편 때마다 덩달아 마음 졸일 일이 없다는 게 다른 무엇보다 기뻤다.
<김혜리의 필름클럽>이 시작된 지 9년. 그동안 매번 챙겨 듣지는 못했어도 문득 생각 나 클릭하면 몇 번이고 여전한 존재로 곁을 함께하는 방송이다. 그렇게 쌓인 시간 속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처음의 목적은 매 회차마다 일종의 코너 속의 코너였던 세 분 각자의 '최근 나를 즐겁게 한 것들', 그리고 아주 느슨한 연대감을 가진 청취자들의 사연에도 귀기울이게 했다. (책의 챕터 중 '(필름클럽의) 장수의 비결'이 곧 필름클럽을 지금까지도 듣는 나의 이유이기도 해서 놀랐다. 그 방송에 그 청취자..!)
최다은 피디님의 첫 책 <비효율의 사랑>의 탄생도 그렇게 제목도 모르는 채로 오래 기다려왔던 책이다. 이 책에는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리고 알고 싶었던 최다은 피디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듣는 걸 좋아해서 "오랜 시간 듣는 것을 훈련해온 사람", 라디오 청취자들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착한 사람'"임을 아는 연출자,
라디오에 이어 팟캐스트를, 그 속에서 피디인 동시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진행자, '이명'이라는 아이러니하고도 몹쓸 증세를 겪고도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 앞에 초연함을 배운 대단한 직장인-으로서의 저자로서 말이다.
이 책에는 외롭고, 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프고, 아프지만 초연하게 버티려 하는 보통의 우리, 그리고 닮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게 듣는 행위처럼 눈을 기울여 이 책을 천천히 읽었다. 누구나 마음의 높낮이를 신경쓰지 않고 담담히 읽을 수 있고, 그러다보면 이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털어놓는 저자와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는 자신도 사랑하게 만드는, 온기를 품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