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인조로 데뷔했던 여자 아이돌 그룹이 두 멤버의 탈퇴와 새 멤버의 영입으로 4인조가 되고, 5년차에 이르러서야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를 갖게 된다. 조우리의 소설 <라스트 러브> 속 제로캐럿의 이야기다. 어딘가 낯익은 스토리이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전에 본 적 없이 신선하다. 마지막 무대에 오르는 멤버 네 명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자신들의 치열했고, 또 분투하느라 스스로도 보듬어주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거기에는 멤버 각자가 노력의 한계를 직면하며 서로의 재능을 동경하고 질투했던 여린 시선들, 그러다 인색해져버리고만 미련 같은 마음들이 남아 있다.
독자로 하여금 시종일관 낮게 가라앉은 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건 마지막 콘서트를 앞둔 팬들의 환호 대신 이들을 향한 어떤 사랑의 기록이다. 실제로 책의 내지는 차례를 번갈아가며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그 종이 위엔 제로캐럿의 오랜 팬인 파인캐럿의 팬픽이 펼쳐진다. 그의 이야기 속에선 다인은 김다인으로 준은 송준희로, 루비나는 이수빈이라는 본명을 되찾고, 아이돌의 무대 의상이 아닌 편의점 알바옷과 교복을 입고 자란 여성들이 있다. 그들은 그 안에서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고 기꺼이 질투하고 슬퍼한다. 허구의 이야기일지언정 무언의 의무감에 짓눌려 거짓 웃음을 짓지 않고 진짜 감정을 나눈다. 이 팬픽은 제로캐럿의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해져버린, 지극히 평범했을 시절들을 만들어내 동성애와 같이 현실 속에선 쉽게 허락되지 않은 감정들은 그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허용된다.
이처럼 소설 <라스트 러브>는 아이돌의 대상화를 벗어나 그룹의 멤버로서가 아닌 평범한 그들 각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불러오고, '팬픽'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폄하되어 사려 깊게 다뤄지지 않는 마음들이 교차해 이 모두를 헤아리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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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우리 작가처럼 한때 열렬한 사랑을 마지 않던 팬으로서, 그 마음을 아는 천희란 소설가의 발문 중에서 가져왔다. 나는 이들 같은 경험이 없다고 거리를 두려다 이 구절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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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팬도 존재했다. 대체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음악을 듣거나 패션을 따라 하고 팬레터를 쓰는 정도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친구나 애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에게 주는 건 좋은 음악과 볼거리가 전부인데, 어째서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을 바치는 게 아깝지 않았던 걸까.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테니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 그 사람들은 불행한 십대를 버틸 수 있게 한 존재였다. 그들은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그들을 봤다. 현실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이 부족하거나 과하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고맙다고 답해주는 사람.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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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올 여름에서야 발매된 지 4년이 지난 f(x)의 마지막 정규 앨범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고, 자주 즐겨 듣곤 했다. 핑클이나 SES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던 어렴풋한 유년을 지나 십대 시절 짧지만 거의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이 책 <라스트 러브>의 내용을 모른 채로 읽기 직전부터 다시 듣기 다 읽은 지금까지 듣고 있다. 한 때 멤버였던 이의 죽음과 애도의 시기와도 맞물렸던 시점이었다. 그 때문인지 소설 속 제로캐럿 멤버들의 독백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고, 다 읽고 나서는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4 walls> 무대 영상을 볼 때 슬픈 감정 같은 것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섣불리 정의 내릴 수 없겠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사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