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진영의 첫 소설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었을 때를 기억한다. 십대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동안 잠시 만났던 그 소설 속 주인공을 나는 '뒷모습'으로 떠올린다. 내 또래였지만 나와는 달랐던 그 소녀, 자신을 거칠게 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거칠어져버린 주인공이 낯설고 무섭기도 해서 그 아이가 보고 듣고 들려주는 걸로만 세상을 이해했다. 내가 그 소설의 잔상을 뒷모습으로 기억하는 건 어쩌면 실패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 소녀의 앞모습을 보지 못했거나 보고서도 잊어버리고만, 감상일 수도 있겠다.
<이제야 언니에게>의 제야는 맑고 여린 아이다. 여동생 제니와 사촌 남동생인 승호가 함께하는 그 작은 세계는 너무 소중해서 그 시절을 영영 잃게 만든 사건 이후에는 마치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다. 당숙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 제야의 삶은 절벽에서 무게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같이 위태롭다. 또래 속에서 맏이로 지내며 막연하게 어른을 꿈꿨던 제야가 어른들 속에 둘러싸여 내몰리고 상처 받는다. 미안하다는 말을 죄 없는 사람들끼리 주고 받으며 끝없이 아파해한다. 나는 기어코 이 모든 걸 기억하려, 강해지려 애를 쓰는 제야의 일기를 읽으며 수많은 문장들을 건너뛰려다 다시 되돌아 읽곤 했다.
제야에게는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으로 그녀를 품어준 강릉 이모와 언제나 곁에 있어준 두 동생들이 있었지만, 제야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만이 영원히 현재형일 이 고통을 극복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걸 끝내 받아들인다. 이 결심은 "열일곱살 이제야가 보고 있을 어른 이제야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며 나아가 "세상 어딘가에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어리고 젊고 늙은 이제야를" 위한 응원이기도 하다. 이제야 알았고, 이제서야 끋내 마주하지 못했던 그 소녀와 겨우 보폭을 맞춰 옆모습을 본 기분이다. 나를 스쳐간 누군가의 이야기, 내가 결코 모르지 않던 사람의 이야기. 아프지만 결국엔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그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감히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