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환상적인 경성에
'다이쇼 로망'이라는 말이 있다.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大正浪漫)은 일본에서 다이쇼 시대(1912~1926)의 낭만주의 사조를 뜻한다.
일본에서 다이쇼 시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군국주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대공황과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던 쇼와 시대 초기의 1930년대~194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때문에 일본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다이쇼 로망이라고 한다. 유럽의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와 비슷한 느낌이다.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융성했다는 이유로 현대에는 곧잘 미화되지만, 실상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수탈로 이룬 번영이었다는 점과 하층민들의 삶은 궁핍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하다.
- 나무위키, 다이쇼 로망 항목 중
위 설명에도 언급되듯이,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와 같은 향수를 주는 시대이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를 '경성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이쇼 로망'처럼 명확한 장르로서 규정되기보다는 투여서 부르는 정도인 것 같다. 근래에 이 시기를 그린 작품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다.
개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깊은 흥미를 느낀다. 그때에 태어났다고 한들, 내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는 타고난 겁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이야기를 접하고 분개하거나 같이 가슴을 졸이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경성 환상 극장』은 특이한 앤솔로지 단편집이다. 최지원, 전효원, 장아미, 김이삭, 한켠, 이 다섯명의 작가들이 모여서 각자 작품을 쓰는데, 그 작품들이 일종의 연작처럼 이어진다. 크게 세 가지 지점을 공유하는데, 시간대로는 '식민지 시기 경성'이라는 점, 공간대로는 경성의 <카르멘>을 상영하는 "환상극장"이라는 점, 그리고 소설의 주제가 모두 사랑, 로맨스라는 점이다.
각각의 단편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최지원, 「경성의 카르멘」
전효원, 「좋아하는 척」
장아미, 「무대 뒤에서」
김이삭, 「사랑의 큐피드」
한켠,「빛으로 빛으로」
이 작품의 서두에 수록된 「경성의 카르멘」은 이후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카르멘>의 대본을 쓴 작가에 대한 이야기다. <카르멘>은 원래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다. 전세계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극장에 가장 많이 올려지는 레퍼토리다. 이번에 조금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익숙한 곡들이 이 오페라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우사의 노래>, <하바네로>, <서곡> 등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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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환상 극장』 내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을 연극으로 올린다. 그러기 위해선 대본의 수정이 필요한데, 이 수정을 맡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경성의 카르멘」이다.
이어지는 전효원 작가의 「좋아하는 척」은 조연 배우와 연극의 투자자를 조명한다. 『니자이나리』에서도 느껴졌듯이 대화를 생동감 있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아미 작가의 「무대 뒤에서」는 <카르멘>을 공연하는 극단 '유월회'의 의상을 담당하는 '보헤미안' 사장과 무대 배경을 그리는 인물의 이야기다.
김이삭 작가의 「사랑의 큐피드」는 환상극장 매표소 직원과 베일에 쌓인 신비로운 인물인 극장주가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켠 작가의 「빛이여 빛이여」는 환상극장의 초연 공연에서 벌어졌던 10년 전 일을 다루고 있다. 그 공연에서 '카르멘' 역을 맡았던 여주인공과 무대 조명 담당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유일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희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중의 주요 배경으로 설정된 장소가 '환상극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재밌게 다가온다.
『경성 환상 극장』이 동시기를 다루는 작품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미스터션샤인>이 독립운동을 서사의 큰 축으로 삼아 이야기와 주제가 진행된다면, 『경성 환상 극장』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 운동 같은 거대 담론은 완전히 배제하고 사랑과 같은 이야기에 집중한 것은 아니다. 『경성 환상 극장』에도 (의열단을 모티프로 한 것처럼 보이는) '열혈단'이라는 무장 투쟁 단체가 등장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단편들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중심 주제가 '사랑'이다보니, 식민지 경성의 시대상 같은 것에 조금 더 집중이 된 느낌이었다.
또한 구성적으로 5편의 작품들이 다른 작품의 꼬리를 물고 있는 구조라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척」에서 보헤미안 의상실에서 일하는 환희가 요새 자주 안 보인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동안 환희가 무엇을 했는지는 「무대 위에서」에서 밝혀진다. 또한 「무대 위에서」에서는 티켓걸 란주가 <카르멘> 상영 직전 준비 기간동안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언급되는데, 그동안 란주가 무엇을 했는지는 「사랑의 큐피드」에서 밝혀진다.
이런 식으로 앞 작품의 떡밥이 뒷 작품에서 해소되는 부분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시간대가 서로 겹치고 벌어지고 하다보니, 「경성의 카르멘」의 말미에 죽음을 맞은 정호진이 「좋아하는 척」에서는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지점은 세계관을 맞물리던 작업 중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옥의 티인듯 하다. (이후 이어지는 「사랑의 큐피드」(214쪽)에는 정호진의 죽음이 드러나있다.)
"이런 시대에 생각 없이 살면 총 맞아야지."
-『경성 환상 극장』, 277쪽
처음 접해보는 연작 형식의 엔솔로지 작품집이라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무대 위에서」는 읽기가 조금 어려웠는데, 아무래도 적은 분량에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을 담으려다보니 인물들의 심정을 모두 공감하기 어려웠다. 더 긴 분량이었다면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런 시대에 생각 없이 살면 총 맞아야지."-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