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명한 승려가 강연을 하던 중, 회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며 이렇게 물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님이 전도에 대해 너무 큰 부담을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우선, 크리스천이 신앙의 문제를 승려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코믹하게 느껴져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승려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적인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전도는 삶으로 하는 것이지, 구약의 하나님처럼 심판과 율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교회에서도 그대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도, 성서도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대표적 율법서인 레위기 19장 18절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구약 성서 전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잘 표현되어 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승려가 하는 말을 듣자니 '에고~ 성서는 읽지 않고 누가 쓴 책을 생각 없이 그대로 옮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도는 삶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삶에 그 열매가 나타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이지 전도를 위해 착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전도는 그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전하지 않고 못 배기는 감정과 행동이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 부담을 가질 수 있으나 세상에 이 기쁨을 알리지 않으면 너무 안타까워 긍휼히 여기는 숙제 같은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족속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 강연의 영상 아래 댓글을 보니 대중들이 탄복하며 교회 목사보다 낫다고 아우성이다. 목사 보다 나은지 때가 되면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지만, 성서를 맘대로 해석하다니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다. 성서는 인류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다. 세상 종말에 그 사랑이 육체를 취하시고 인류에게 오셨다.
이름 자체가 ‘구원’(예수) 이신 분, 그분이 다윗의 동네에 오셨다.
성서의 계시가 성취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ὅτι ἐν τῇ σοφίᾳ τοῦ θεοῦ
οὐκ ἔγνω ὁ κόσμος διὰ τῆς σοφίας τὸν θεόν,
εὐδόκησεν ὁ θεὸς διὰ τῆς μωρίας τοῦ κηρύγματος
σῶσαι τοὺς πιστεύοντας.**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