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1945년부터 현재까지 인류가 전쟁을 겪지 않은 시간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흐른 시간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정도다. 명목상일 뿐이지만 한국이 현재 전쟁 중인 국가라는 점도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쟁을 잊고 산다. 바로 옆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기 때문일까?
<삶과 운명>은 세 권의 방대한 분량에 걸쳐 독소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2년에서 1943년의 광경을 그린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나이에 참전한 독일 병사의 고뇌를 조명했다면, 이 작품은 동부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포탄을 쏘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카잔으로 피신한 평범한 가족도, 수용소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똑같이 전쟁을 겪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국가주의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다. 1권에서는 나치의 수용소 - 즉 유대인 학살소 - 를 현실적으로,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용소를 짓고 관리하고 시체를 태우는 일을 맡은 사람들까지도 포착함으로써 이 잔인한 행위가 얼마나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휴전으로 끝난 상황을 상정한 로버트 해리스의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떠오르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이니 이곳에서 서술하진 않겠다!)
2권에 이르러서 작품은 스탈린 치하 소련도 나치 독일과 다르지 않은 국가폭력을 저지르고 있음을 고발한다. 1937년부터 전쟁 직전까지 이어졌던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가? 스탈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부에서부터 시작된 대숙청이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스의 말 그대로 '우리의 손도 당신네 손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일을 사랑하며, 더러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제2부 121p)
작가가 만든 약어 '고스스뜨라흐(Госстрах)'는 국가를 뜻하는 '고수다르스트보государство'와 공포라는 뜻의 '스트라흐страх'를 합친 단어다. 말 그대로 국가에 대한 공포라는 뜻이다.
인간은 공포를 극복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깜깜한 곳으로 들어가고, 병사들은 전투에 나가고, 젊은이는 낙하산을 메고 한발짝 내디뎌 낭떠러지로 뛰어내린다.
그러나 이 공포는 특별한, 힘겨운, 수백만 사람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공포다. 이 공포는 모스끄바의 납 같은 잿빛 겨울 하늘에 불길한 붉은 글씨로 울긋불긋하게 적힌 그것, '고스스뜨라흐'다. (제2부 325p)
모스똡스꼬이가 2권에서 마주했던 친위대 장교 리스가 그의 '해부용 거울'인 것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나치의 전체주의/파시즘 국가폭력은 계속해서 병치되며 등장한다. 대숙청 당시 한번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히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다. 고문 끝에 목숨을 잃거나 시베리아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숙청되지 않고 굴라크에 끌려가는 것에 그쳤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무죄를 인정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마 이 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나아가 러시아를 미국과 겨룰 만한 강대국으로 만든 이른바 '대조국전쟁'의 당위성을 비판했기 때문에 이 책이 소련에서 출간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문을 열고 사람들은 길을 거닌다고 했다. 잔혹함 속에서도 크고 작은 선의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고스스뜨라흐가 그랬듯이 이것 또한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어쩌면 숫자조차 되지 못했을 죽음들 반면에 수용소에서 곁을 지키고, 음식을 나누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숨겨 죽음의 위기에서부터 구해내는 장면들이 있었다. 한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명확하지 않은 행동에서 얼마나 큰 인간의 선의를 읽을 수 있는지, 국가를 기준으로 나뉜 적과 아군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돌아오는 감정을 느끼며 감동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불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 범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쟁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통렬하게 실감한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의 바탕이 된 실화가 그랬듯이, <삶과 운명>이 믿는 '공포 앞의 선의'가 정말 이 어둠을 헤쳐나갈 힘을 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전쟁에 분노하고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있음을 실감할 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고스스뜨라흐를 이겨낼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