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나의 벤 존슨>이 손에 들어왔는데, 책을 꺼내자마자 표지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옅은 민트빛 바탕에 창문 너머로 비껴드는 하얀 햇살, 그림자처럼 드리운 나뭇잎의 실루엣. 제목의 무게에 비해 표지는 한낮의 늦은 빛처럼 따스해서, 어쩐지 다정한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먼저 들었어요. 책은 핸드북 사이즈로 아담해서 가방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인데, 도톰한 두께가 손에 잡히는 감이 좋더라고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점심 먹고 들른 공원 벤치에서, 그렇게 일상의 틈마다 펼쳐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저는 1988년의 그 경기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세대예요. 어린 시절 뉴스에서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9초 79라는 숫자와 며칠 뒤의 추락까지 어른들 어깨너머로 듣고 자랐습니다. 그 이름이 한국 소설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지금 이 나이에 읽으면 어떤 감각으로 다가올지 궁금했어요. 영광과 추락 사이의 그 짧은 시간을, 사십 대 후반이 된 직장인의 눈으로 다시 마주하는 일이 어떤 결일지요.
이찬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나의 벤 존슨>은 1988년 서울올림픽 100미터 결승의 풍경으로 문을 엽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트랙, 7만 5천여 명의 시선과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가 한 점으로 모이던 그 순간. 작가는 이 장면을 단순한 회상으로 두지 않아요. ‘굳건한 강자의 세계와 약하고 가난한 이의 세계가 뒤섞이고 전복될 수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한 줄로, 9초 79라는 숫자에 작은 사람들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자메이카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가난한 배달부가 ‘체계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 미국의 자타공인 최강자’를 꺾는 그림 자체가, 이 소설이 앞으로 무엇을 이야기할지를 미리 알려주더라고요.

작가의 시선이 가장 따뜻해지는 자리는 그다음입니다. 영광의 9초 79가 잠실 주경기장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동네의 작은 중국집 텔레비전 앞으로, 자장면 배달 소년의 오토바이 위로 옮겨붙는 장면이요. 사장에게 머리를 얻어맞으며 일하던 소년이 ‘와 씨, 캡이야, 벤 존슨!’ 한마디를 혼잣말처럼 흘리고, 자기도 그처럼 빠르게 상가동 13호에 자장면을 배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는 세계신기록이었던 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년엔 학교로 돌아가야지’ 하는 다짐으로 옮겨붙던 풍경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요. 영웅의 이야기가 가장 낮은 자리까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작가가 아주 구체적인 골목의 공기로 보여줍니다.
그 영광을 가게의 벽에 ‘수호신처럼’ 걸어둔 사람이 호달의 할머니 김야무 여사입니다. 88올림픽 개막식 날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보며 ‘불처럼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품고 ‘88국수집’ 간판을 올린 사람. 유남규, 현정화, 김수녕, 그리피스 조이너, 그리고 벤 존슨. 금메달리스트들의 기사를 액자에 담아 일렬로 걸어두고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손님을 맞아온 사람이에요. 알코올중독 남편을 잃고, 며느리 얼굴도 모른 채 갓난 손자를 들쳐 업고, 음주 운전 사고로 외아들마저 보낸 그녀가 ‘없는 밤, 밤이 없다’는 자기 이름처럼 살아낸 시간. 작가는 이 시련의 목록을 감정 과잉 없이 담담하게 펼쳐놓아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영광의 한복판에서 품었던 예감이 시간이 흘러 정반대의 의미로 회수되는 자리에서, 책을 한참 덮어두었어요.
그리고 신림동 고시촌의 호달이 있습니다. 월세를 내지 못해 고시원에서 쫓겨난 청년, 지하철 불법 촬영 누명을 쓴 청년, 피시방 매니저에게 임금을 떼이며 머리를 얻어맞는 청년. 자신을 벤 존슨이라 믿는 정체불명의 중년 남자와 호달이 마주 앉은 잔치국수 한 그릇 앞에서, 호달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시간을 처음으로 풀어놓아요. 사람들로 붐비는 국숫집 한가운데 두 사람의 테이블만 ‘섬처럼 고요했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그 고요는 곧 배신으로 뒤집혀요. 남자는 국숫값 대신 호달의 지갑을 슬쩍 맡겨두고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호달은 등 뒤로 소금 세례까지 맞으며 쫓겨나고요. 그런데 곧장 ‘받을 돈이 얼마야?’ 하며 호달을 끌고 피시방으로 향하는 그 능청스러운 발걸음이, 이 책이 그리는 ‘다정한 참견’의 가장 솔직한 모양이지 싶었어요. 깔끔하지 않고, 자존심 상하고, 시끄럽고 성가시지만, 그래도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이 머무른 자리는 ‘패배의 법칙’이라는 챕터예요. 피시방 매니저에게 멱살이 잡혀 시멘트 담벼락에 등이 후벼파이면서도, 남자는 호달이 골목을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매니저의 팔에 매달립니다. 저항하면 할수록 인생은 더 많은 매질과 좌절을 안겨주었고, 오래 견딘다는 건 짧게 끝낼 수 있는 고통을 길게 연장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몸으로 체득한 사람. 그래서 ‘자신이 패배자로 운명지어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생의 열차는 속력을 얻고 종착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혼자 힘으로는 누구도 그 경로에서 감히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패배의 법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자기 인생을 그렇게 정의해온 사람이, 처음으로 그 법칙에 작은 예외를 만들려고 누군가의 팔에 매달립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가 떠올린 건 ‘약물의 도움 없이도 이미 최고였던’ 벤 존슨이었어요. 가난한 배달부에서 정상의 자리까지 ‘자기 앞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기적의 사나이’. 그가 스스로 함정을 팠을 리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만 했던 한 중년 남자의 오랜 마음이 그 골목의 시멘트 담벼락 앞에서 가장 진하게 드러납니다.
“패배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패배의 법칙 같은 건 없어야 했다. 저 아이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봤어요. 패배의 법칙을 가장 깊이 믿어온 사람이 그 법칙을 부수려고 마음을 내는 순간, 그 결심의 첫 번째 이유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저 아이’라는 점에서요. 그리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가 따라붙는다는 순서가 마음에 박혔습니다.
읽는 내내 사무실의 어떤 풍경이 자꾸 떠올랐어요. 요즘의 일터는 참 매끄럽고 쿨해요. 누구도 함부로 묻지 않고,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습니다. 회식이 줄고, 사적인 안부가 줄고, 메신저 한 줄로 끝나는 대화가 늘었어요. 그게 편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옆자리의 후배가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제 점심 도시락을 한참 들여다보다 “자네, 요즘 끼니 잘 못 챙기지?” 한마디를 던지고 가셨던 적이 있어요. 그땐 그 참견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돌이켜 보면 그게 ‘옆에 있어준다’는 말의 가장 정확한 모양이었습니다. 무례함을 다 벗겨내고 나면 남는 그 낡고 두꺼운 애정. <나의 벤 존슨>이 소환하는 ‘질척이는 관심’이 바로 그런 결이에요.
이 책의 다정함은 깔끔하게 포장돼서 오지 않아요. 시끄럽고 성가신 옷을 입고 먼저 들이닥칩니다. 지갑을 슬쩍 가져가고, 묻지도 않은 잔소리를 늘어놓고,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자꾸 끼어들고요. 그 무례함의 안쪽에 어떤 낡은 애정이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려요. 작가는 그 시간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래서 “옆에 있어주잖아요. 나 가족 생긴 거 처음이에요.”라는 호달의 고백이 도착할 즈음에는, 그 말이 멜로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처음 느껴본 온도라는 게 자연스럽게 믿어졌어요.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88올림픽의 영광과 추락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세대에게 이 소설은 ‘그때 그 시간’이 지금 이 골목의 누군가에게 어떻게 가닿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같아요. 사무실에서 서로의 영역에 발 들이지 않는 일을 미덕처럼 익혀온 사람에게는, 한때 자기를 살게 했던 ‘귀찮은 어른들’의 자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책이고요. 결승선의 기록보다 옆에서 같이 숨을 고르며 달려준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는 작가의 말이, 다 읽고 나니 빈말이 아니더라고요.

오월의 끝자락, 햇살이 길어진 요즘 가방 안에 이 책 한 권을 넣고 다녔어요. 점심 먹고 들른 공원 벤치,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 옆, 잠들기 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조금씩 읽었습니다. 표지에 비껴들던 그 하얀 빛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일상의 모서리에 잠시 머물러 있더라고요.
한 줄로 남겨두자면, 무례함의 옷을 입고 도착한 다정함이 한 사람의 ‘패배의 법칙’을 어떻게 다시 쓰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서평을 덮으며 떠오른 얼굴이 있었습니다. 1988년의 그 경기를 어른들 어깨너머로 기억하는 분들. 9초 79라는 숫자와 함께 자랐고, 지금은 사무실에서 매끄러운 거리감을 미덕처럼 익혀온 분들에게 이 책이 한 번쯤 옛 골목의 공기를 데려다줄 거예요. 그리고 요즘 어쩐지 옆자리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 누구의 일에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이 어른의 예의라고 생각해온 분들에게도 가만히 건네고 싶습니다. 무례함을 다 벗겨내고 나면 남는 그 낡은 애정의 자리를, 이 책이 조용히 다시 열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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