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은 출근길에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회사 문 앞에 도착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매일 지나치는 골목의 간판 하나, 가게 앞에 세워 둔 화분 하나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펜 한 자루로 시작하는 별나라의 어반 스케치>를 받아 들고 가장 먼저 든 마음이 그랬습니다. 잠시라도 손에 펜을 쥐고 동네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
이 책은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만나게 됐어요. 표지에는 오래된 세탁소 한 채가 펜선으로 또박또박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초록 화분이 슬며시 번지듯 칠해져 있습니다. 처음 표지를 봤을 때 떠오른 건 의외로 학창 시절이었어요. 교과서 귀퉁이에 작게 낙서하고, 연습장에 사람 얼굴이며 강아지, 고양이를 그려 보던 시절. 서툰 손이 그대로 낭만이 되던 때였습니다. 요즘은 AI가 그림을 대신 그려 주는 시대지만, 그 시절엔 연필 한 자루와 빈 종이 한 장이면 충분했어요.
저자 고은정(별나라)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12만 명 가까운 분들과 그림으로 소통하고 있는 분이에요. 책 전체의 어조가 영상 강의를 옆에서 듣는 느낌이라, 그림을 처음 시작하는 분이든 예전에 잠깐 그려 봤던 분이든 부담 없이 펼칠 수 있습니다. 단계별 안내가 워낙 친절해서,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망설일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예요.
처음 펼쳤을 때 가장 마음이 놓였던 부분은 도구 챕터였습니다. 워터 브러시, 사쿠라 화이트 펜, 마스킹 테이프, 셀룰로스 스펀지, 라이터, 미니 스프레이까지. 어반 스케치라는 말만 들으면 거창한 장비가 필요할 것 같지만, 작가는 ‘고가의 피그먼트 펜 대신 모나미 네임펜 얇은 심을 자주 쓴다’고 솔직하게 적어 두었어요. 비싼 도구가 아니어도 손에 익은 펜 한 자루면 시작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려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기초 클래스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문장은 33쪽의 한 줄이었어요. “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선을 긋는 시간도 늘어나야 합니다. 초보자일수록 이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빠르게 그으려는 손목을 잠시 붙잡아 두는 한마디인데, 이상하게 이 문장이 일터에서 떠오릅니다. 보고서 한 줄도, 메일 한 통도 길어질수록 그만큼의 시간을 더 들여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그림 이야기인데 일하는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었어요.
38쪽에서는 세잔의 말이 인용됩니다. “모든 물체는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거기에 ‘기초 도형으로 단순화해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그림이 훨씬 쉬워진다’는 해설을 덧붙여 두었습니다. 직육면체를 그릴 때 보이지 않는 뒷면까지 가상의 선으로 먼저 그어 보고, 그 다음에 그 선을 지운다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안 보이는 곳까지 한 번 헤아려 본 다음에야 보이는 부분이 자리를 잡는다는 뜻 같았거든요. 일도 사람도 결국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연물 챕터의 덤불 그리기에서는 ‘자연물이므로 좌우 대칭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조언, 그리고 외곽선이 ‘너무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따뜻했어요. 행잉 식물 페이지에서는 잎의 외곽을 ‘세계지도를 그리듯 자연스럽게 만들어 달라’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정확함보다 흐트러짐을 허락하는 어조가 책 전반에 흐르고 있어서, 펜을 쥔 손이 자꾸 풀어집니다.
거리 요소 클래스는 표지의 세탁소 그림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장이에요. 에어컨 실외기, 환기 덕트, 목욕탕 간판, LPG 가스통, 버스 정류장 안내판처럼 평소엔 눈길 한 번 안 주던 사물들이 그림 소재로 줄지어 등장합니다. 환기 덕트 페이지에서는 굴곡진 원기둥 몸통을 ‘로봇 팔처럼 중간중간 분절되어 있다’고 묘사해 두었는데, 이 비유 하나만으로도 퇴근길 골목의 환기 덕트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LPG 가스통의 윗부분은 ‘아주 두꺼운 종이를 오래 말았다가 펼친 형태’라고 적혀 있고요. 동네 식당 앞에 무심히 놓여 있던 그 가스통도, 빛의 방향을 떠올리며 보면 입체가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인물 클래스에서는 188쪽의 팁이 가장 좋았어요. “얼굴의 캐릭터성을 살릴 때는 가장 특징적인 포인트를 강조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자나 안경은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먼저 그리면 훨씬 쉽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닮게 그리려 애쓰기보다 그 사람의 한 가지를 골라낸다는 시선이 좋았습니다. 179쪽의 좌식 포즈 설명에서는 ‘다리가 다른 물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면 굳이 만들어 그리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략한다’는 문장이 오래 남았어요. 안 보이는 건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완벽주의로 자주 지치는 어른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후반부의 네거티브 스페이스 드로잉 장에서는 한 문장이 발을 멈추게 했어요. “주제를 살리고 싶을 때는 ‘무엇을 더 그릴까?’보다 ‘주변을 어디까지 덜어낼까?’를 먼저 결정해 보세요.”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 내는 일이 먼저라는 시선이에요. 이맘때쯤 되면 새로 쥐는 일보다 손에 든 것을 어떻게 내려놓을지가 더 큰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림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실전 클래스의 일본 주택 그리기 페이지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이어져요. ‘담벼락을 그리기 전에 나무 기둥을 먼저 그린다. 더 앞쪽에 있는, 가려진 부분이 없는 물체를 먼저 그리면 스케치를 훨씬 쉽게 완성할 수 있다’는 안내였는데요. 가까운 것부터 먼저 그린다는 단순한 원칙이, 일과 관계의 순서를 정할 때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싶었습니다.
따로 아쉬운 점이라 할 만한 부분은 없었어요. 굳이 한 가지를 적자면, 한 권에 워낙 많은 주제가 담겨 있다 보니 마음에 드는 챕터가 더 두꺼웠으면 싶은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라면 오히려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은 두 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학창 시절 교과서 귀퉁이나 연습장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게 좋았던 분들이에요. 그 시절의 손맛을 다시 꺼내 보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분이라면, 도구부터 실전까지 한 권에 담긴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 줄 거예요. 다른 한 분은 매일 같은 출퇴근 길이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직장인입니다. 골목의 환기 덕트, 가스통, 정류장 안내판 같은 사물도 그림 소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익숙한 길이 조금은 새롭게 보이실 거예요.
5월 끝자락, 해가 길어져 퇴근 후에도 한참 동안 골목이 환한 계절입니다. 가방 옆 주머니에 작은 스케치북 한 권과 펜 한 자루를 슬며시 넣어 두는 일, 올해 제가 시작해 보려는 작은 일과예요. 동네 한 모퉁이에 잠시 앉아 세탁소 간판이든 자판기든 한 장 그려 보는 저녁이 생긴다면, 그날 하루는 평소보다 한 박자 천천히 흘러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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