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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튀
  • 인류 멸종 실패기
  • 유진
  • 16,920원 (10%940)
  • 2026-04-22
  • : 795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처럼 환절기와 초여름 사이를 오가는 5월의 끝자락,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권의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만난 <인류 멸종 실패기>였어요. 표지부터 눈길을 끄는 책이었습니다. 빈티지 판화풍 일러스트 안에 해골과 말 탄 사람, 깃펜을 든 손과 양팔을 펼친 인물이 한데 모여 있어서 박물관 전시 포스터를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노란 띠지에 박힌 굵은 제목 아래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라는 카피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는데,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튜브 영상 하나를 막 재생하기 직전 같은 작은 설렘이 일 만한 표지였어요.


저자 유진 님은 유튜브 채널 〈유진의 실화파일〉을 운영하면서 ‘박물관에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추적해 온 분이라고 합니다. 책도 그 결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왕과 영웅 대신 ‘어떻게든 살아남은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위생과 식탁, 도시, 의료, 노동 네 파트로 나뉘는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질문은 단 하나였어요. 만약 제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며칠을 버틸 수 있었을까.

처음으로 발을 멈춘 곳은 37쪽부터 시작되는 ‘납과 수은으로 빚어낸 하얀 얼굴의 비극’이었습니다. 16세기 잉글랜드 귀족 사회의 이상은 ‘창백한 도자기 같은 피부에 와인처럼 붉은 입술’이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 기준을 납과 식초를 섞은 ‘베네치안 화이트’와 황화수은에서 추출한 붉은색 안료로 구현해 냈다고 해요. 짙은 화장의 계기는 1562년 천연두 감염 이후 얼굴에 남은 흉터였습니다. 41쪽에는 ‘여성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에게 흉터는 정치적 약점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한 사람의 결정을 단순한 허영으로 읽지 않게 만드는 대목이었어요. 1596년경 여왕의 외모를 늙거나 왜곡되게 묘사한 초상화를 제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기록까지 따라가다 보면, 초상화 속 그녀가 점차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상징적 존재로 변해 갔다’는 표현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가장 깊게 박힌 문장은 42쪽 마지막에 있었어요. “외면의 완벽함을 위해 내면의 건강을 감수했던 선택. 그것은 개인의 전략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가 요구한 가면이었을까요?” 일을 마치고 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는 마흔 후반의 직장인이라면, 이 두 줄이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사원증을 매만지고, 표정을 한 번 정리하고, 목소리 톤을 손보는 일은 사실 우리 모두 매일 하고 있는 작은 화장이니까요. 다만 우리에게는 납도 수은도 없을 뿐이지요.

다음으로 오래 머문 곳은 164쪽부터 이어지는 수술실의 풍경이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런던은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톱날에 다리를 베이거나 증기 펌프에 팔이 끼이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졌다고 해요. 부서진 뼈와 괴사한 다리에 의사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절단뿐이었습니다. 그것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이 오래 남았어요. 마취가 없는 시대였으니 환자는 ‘수술대 위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칼이 뼈를 가르는 순간을 그대로 느껴야 했고’, 보조자 두세 명이 양팔과 다리를 눌렀습니다. 술이나 아편을 조금 먹이긴 했지만, 책은 그것이 통증을 줄이는 게 아니라 ‘단지 기절하기를 바라는 수준’이었다고 적습니다.


165쪽에서 만난 한 줄은 한참 페이지를 덮게 만들었어요. ‘이렇듯 마취도 소독도 없던 시대, 외과의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지식이나 기술보다도 속도였습니다.’ 19세기 런던의 외과의 로버트 리스턴은 다리 절단을 28초 만에 끝낸 기록이 있다고 해요. 그는 수술을 시작할 때마다 “시간을 재시오, 신사 여러분”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속도전이 부른 사망률 300%의 일화가 이어지지만, 책은 진위를 따지기보다 ‘당시의 수술 환경이 얼마나 위험하고 광기 어린 속도전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라고 정리합니다. 덤덤한 문장이라 더 오래 책장에 손이 머물렀어요.

다행히 168쪽부터는 숨을 돌릴 수 있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1846년 미국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윌리엄 모턴이 에테르 가스로 환자를 깊은 잠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고, 소식을 접한 리스턴은 런던에서 첫 에테르 마취 수술을 마친 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이 미국산 발명품은 최면을 완전히 능가한다.” 이어서 스코틀랜드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영 심슨이 클로로포름을 자신과 동료들에게 직접 실험하다 모두 기절해 쓰러진 일화, 그리고 1853년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왕자를 출산할 때 클로로포름을 사용하며 일기장에 “축복받은 클로로포름. 그 효과는 진정시키고 평온하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라고 적은 기록이 나옵니다.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닫혀요. ‘외과 의사들은 이제 환자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걸 막기 위해 속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두통에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오후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오래 책장에 머문 곳은 250쪽부터 시작되는 어린 광부와 섬유 공장 아이들의 이야기였어요. 20세기 초 미국 산업의 동력은 ‘석탄과 값싼 노동력’이었다고 책은 적습니다. 펜실베이니아 북동부 무연탄 산지에서 광부의 일당은 2달러 남짓, 어린 소년들이 하루 9~10시간을 일하고 받은 돈은 약 75센트였습니다. 광산 회사는 그 아이들을 ‘작고 민첩한 노동력’이라 불렀어요. 사회학을 전공한 교사 출신 사진가 루이스 하인이 1908년 낡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남부의 작은 공장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는 장면도 깊게 남았습니다. 252쪽에 실린 그의 메모는 한 번 읽으면 잘 잊히지 않아요. “(석탄) 먼지가 너무 짙어서 때때로 앞이 안 보였고, 이 먼지는 소년들의 폐 깊숙이 침투한다. 감독자는 아이들 위에 서서 말을 듣게 하려고 (막대기로) 찌르거나 발로 차곤 한다.”

직장인으로 오래 살아온 입장에서 이 챕터가 유난히 길게 남았던 이유가 있어요. 254쪽에 ‘하루 10시간은 기본이었고 바쁘면 12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습니다. 주 6일 근무가 원칙이었지만 일요일에도 불려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숫자만 떼어 놓고 보면 우리 부모님 세대가 청춘을 통과한 풍경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이거든요. 산업화의 심장이 누군가의 폐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지금의 안전 보건과 근로 기준법이 얼마나 많은 실패와 희생을 딛고 만들어진 것인지를, 새삼 차분히 곱씹게 됐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가장 오래 남은 감각은 묘한 안도였어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저는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마취 없는 수술대 위에서도, 납이 섞인 화장품 앞에서도, 톱밥이 깔린 진료실이나 12시간 교대의 방직기 앞에서도 오늘의 저는 하루를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시대에 태어나느냐’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느냐를 가른다는 사실이 새삼 또렷해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면에서는 큰 행운을 안고 있는 셈이지요.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자극적인 일화가 워낙 강해서 읽고 난 직후에는 뒷맛이 무거울 수 있다는 점이에요. 다만 저자가 비극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통과해 여기에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계속 끌고 가기 때문에, 책장을 덮고 나면 무거움보다 단단한 감사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5월의 밤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두고 책을 덮은 뒤,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아 마셨어요. 깨끗한 수돗물, 켜기만 하면 들어오는 불, 가벼운 두통에 손에 잡히는 진통제. 누군가의 실패와 누군가의 발명이 켜켜이 쌓인 자리에서,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지는 밤이었습니다.


무사히 출근하고 무사히 퇴근하는 오늘이, 사실은 오랜 실패 위에 겨우 얹힌 하루라는 걸 알려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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