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독후감 쓰는 무지렁이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테드 창
  • 7,920원 (10%440)
  • 2013-08-09
  • : 3,042

줄거리

데이터어스는 당대 최고의 가상세계 플랫폼이다. 수많은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각축전을 벌인다. 그곳에 신생 게임회사인 블루감마사(社)가 도전장을 내민다.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인지발달을 통해 성장하는 인공지능, 그러니까 온라인 생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디지언트라 불리는 그것은 일반적인 가사도우미 로봇이나 기존의 가상 애완동물에 장착된 인공지능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용자는 진짜 갓난아기를 키우듯 디지언트를 기르도록 되어 있었다.

전직 동물원 사육사 출신이자 초짜 소프트웨어 테스터인 애나가 블루감마사의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그녀가 할 일은 아직은 시제품인 디지언트를 시장에 내놓을 만한 완제품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애나는 처음엔 가상 동물을 조련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임에 적응하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디지언트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그건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디지언트의 외관 디자인을 담당했다. 그건 애니메이터라는 자신의 이상과는 너무도 괴리가 큰 직업이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작업물을 시무룩하게 대했다. 그러나 디지언트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가 디자인한 얼굴이 기쁨과 슬픔, 실망, 심지어 애원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점차 애정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출시된 디지언트는 대성공이었다. 한 해에도 몇 만 개의 디지언트가 판매됐고, 디지언트를 위한 가상 사료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데이터어스에서 디지언트를 기르는 것이 유행했다. 디지언트 사용자들의 커뮤니티도 생겼다. 경쟁사에서 뒤늦게 아류 디지언트를 내놓았지만 블루감마의 것만큼 평이 좋진 않았다. 디지언트를 위한 파생상품들도 속속 등장했다. 그 중 하나는 어느 장난감 회사에서 만들어낸 로봇 외피였다. 디지언트를 온라인 바깥으로 불러내 주인과 함께 산책도 하고 소풍도 갈 수 있었다. 디지언트들은 차근차근 성장해나갔다. 옹알이 같은 발음이 또렷해지고 서로 질투하기도 했다. 주인을 향한 사랑을 인간 아이처럼 표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디지언트의 성장과 더불어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 건 즐거움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지되는 디지언트가 늘어났다. 주인을 잃고 온라인에 방치된 디지언트도 생겼다. 디지언트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결국 블루감마사는 디지언트 서비스를 중단했다.

회사가 문을 닫을 때 애나와 데릭은 초창기 때부터 함께 한 디지언트들을 입양했다. 공식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애나와 데릭을 비롯한 디지언트 사용자들은 그들끼리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외부 교사를 고용해 홈스쿨링을 시키고 글을 가르치는 등 디지언트를 계속 길렀다. 디지언트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취미를 가졌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나름의 사색을 거친 의견을 피력했다. 인간이 성인이 되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듯, 디지언트도 서류절차를 거쳐 법인으로 등록되면 법률적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었다. 디지언트들은 자신이 하루 빨리 법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러는 사이 굳건해 보이기만 하던 데이터어스마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새로운 가상세계 플랫폼인 리얼스페이스가 데이터어스를 합병하기로 한다. 옮겨가는 사용자들을 따라 데이터어스에 기생하던 소프트웨어들이 리얼스페이스 공간으로 이식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망한 회사의 디지언트 제품을 리얼스페이스로 옮겨줄 사람은 없었다. 수명이 다한 상품에서 아무런 이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디지언트들은 황량한 가상세계에 고립되고 만다

문제는 돈이었다. 디지언트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식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개인의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수십 명에 불과한 사용자들이 십시일반 거둬 모으는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디지언트가 수익을 낼 수 있음을 증명해서 기업들로부터 이식 비용을 투자받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두 갈래 선택의 길이 열렸다. 하나는 폴리토프사(社)의 스카웃 제의였다. 폴리토프는 애나가 새로운 타입의 비서용 디지언트를 육성하는 업무를 맡아주길 바랐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인공적으로 상대방에게 애정을 느끼는 호르몬 패치를 몸에 붙이는 것이었다. 폴리토프의 디지언트들은 블루감마의 것과 달리 자폐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육사와 디지언트의 관계가 중요했다. 애나가 이 일을 수락한다면 반강제적으로 외곬수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블루감마 디지언트의 유용함을 어필해서 리얼스페이스에 이식할 수 있도록 경영진을 설득할 기회도 따랐다.

다른 선택지는 섹스로봇 제조업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감정이 풍부하며 주인과의 유대감이 깊은 블루감마의 디지언트를 살짝 손 봐서 개인전용 섹스로봇으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이식 비용 전액은 물론 로열티까지 지급해주겠노라고 약속해왔다. 디지언트는 이제 자신의 아이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자기 아이를 창녀로 취직시키려는 부모가 없듯, 애나와 사용자들은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정작 디지언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발적으로 이 일을 원하고 있었다. 데릭은 디지언트의 주장에 따르기로 한다.


감상

나는 주로 필립 K 딕의 너저분하고 몽롱한 SF를 읽는데, 가끔 테드 창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맨정신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부킹을 하는 것 같은 낯선 기분이 든다. 그 낯섦이 싫은 건 아니다. 클럽에서 술을 마시든 우롱차를 마시든 즐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우롱차 기운만으로도 기꺼이 스테이지에 나가 막춤을 출 만큼 흥미진진하다.

인공지능이 겪는 현실적인 난관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데에 작가는 공을 들였다. 개발 과정에서 우연히 욕설을 익히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지는 등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맞닥뜨리는 현실과 닮은 장면들로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는 디지언트를 실재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에 대한 고민은 이야기가 끝나서도 계속된다. 바야흐로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의 초입에 이르렀다. 시리와 빅스비가 손바닥 안에서 대기하고, 가정용 AI 비서도 출시되었다 한다. 얼마 전엔 바둑계를 평정한 알파고가 유유히 은퇴를 선언했다. 이야기의 결말이 지적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알파고가 은퇴를 선언한 것인가, 구글의 엔지니어로부터 은퇴를 명령받은 것인가. 만약 알파고가 소설 속 디지언트처럼 ‘살아 있다면,’ 알파고의 은퇴를 정할 수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 작가 스스로도 대답을 미루긴 하지만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는 문제다. 아직 우리는 시리와 빅스비와 NUGU에게 반말을 지껄이지만, 인공지능이 전인류의 구루가 되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는 인공지능을 도구가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들은 각각 어떤 일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어떤 인공지능은 목수가 되고 어떤 인공지능은 회계사가 된다. 숲지킴이가 되길 선택하는 인공지능도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또 다른 의문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인공지능을 도구로서 규정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뭐하러 인공지능을 만든단 말인가?

밑도 끝도 없는 의문과 상상이긴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SF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 상상만으로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드는 힘 말이다.

아무튼 미래에 대비할 겸해서, 오늘밤은 공손히 두 손을 포개어 핸드폰을 불러봐야겠다.

“시리, 내일 아침 6시에 알람 좀 맞춰 주시겠어요?”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경험 전체를 스냅샷으로 찍어서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그 복제들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을 통해 태어난 디지언트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각자가 과거에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소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터득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런 디지언트들 각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엑스포넨셜사는 줄 수 없는 존중을. p. 181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