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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ypure님의 서재

붉은 색 표지 위에는 채도가 낮은 검붉은 색의 거대한 함선이 그려져 있다. 제목은 “붉은 브라질”. 이 책만큼 표지와 제목에서부터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망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책 제목의 ‘붉은’ 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강렬함, 열정, 원색적 에너지는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광기의 역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장 크리스토프 뤼팽은 ‘식민주의’와 ‘종교분쟁’이라는 거대한 두 축을 중심으로 침략과 찬탈, 살육의 역사가 결국은 신대륙 브라질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광기의 땅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555년, 프랑스에서는 신대륙 브라질을 프랑스령으로 개척하기 위해 거대한 세척의 함선이 출발한다. 이미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르네상스의 화려한 세례를 받은 16세기 중반, 신대륙을 향한 유럽국가의 야욕은 남의 소유를 빼앗는 ‘침략과 수탈’이 아닌 ‘모험과 도전’으로 포장되어 있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브라질 원정의 총책임자인 빌가뇽 부제독과 성직자, 군사들,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 그리고 주인공 남매인 쥐스트와 콜롱브를 포함한 현지 통역에 쓰일 고아들을 태운 이 거대한 함선은 험난한 여정 끝에 마침내 브라질의 과나바라만에 도착한다.

 

요새 건설을 목적으로 풍성했던 수목은 잘려나가고, 부족간의 전쟁포로로 잡혀온 인디오 노예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된다. 식량과 물자를 조달 받기 위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인디오들도 있으나 빌가뇽의 눈에는 이들 역시 문명과 단절된 미개한 원시인으로 취급 받을 뿐이다. 빌가뇽이라는 인물을 통해 구체화되는 프랑스 식민주의는 작품 중반부를 넘어서 대두되는 종교분쟁과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된 주제인 만큼,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 식민주의의 실체와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나체로 다니는 인디오들에게 ‘옷을 입히는’ 장면일 것이다. 빌가뇽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자연’ 상태로 다니는 인디오들에게 예의와 규범이라는 ‘문명’의 잣대로 그들의 몸에 옷을 걸치게 하는데, 이러한 ‘몸의 구속’은 단지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구속을 뛰어 넘어 인디오들의 정신적 자유와 그들의 터전인 자연에 대한 구속과 침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중반부 이후부터 대두되는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분쟁은 식민주의와 함께 브라질을 더더욱 황폐하게 만드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와 ‘종교분쟁’이 결코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면상으로, 식민주의는 대외적(식민자와 피식민자간의 문제라는 점에서)인 반면 종교분쟁은 대내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식민주의와 종교분쟁은 결국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이는 ‘그들만의 싸움’일 뿐이다. 구교와 신교와의 싸움에서 정작 중요한 ‘신’ 뜻은 그 존재감을 잃은 채 비어있으며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두 세력간의 권력욕   뿐이듯, 빌가뇽의 식민주의 역시 그 땅의 주인인 인디오들의 목소리 대신 착취하는 식민자들의 광기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럽 식민자들의 비열한 야욕이 빚어낸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가는 콜롱브를 통해 이 치욕의 역사를 극복하려 한다. 콜롱브가 인디오들에게서 ‘미개’가 아닌 ‘인간미’를 읽어내어 스스로 빌가뇽 무리를 떠나 인디오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은 콜롱브가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류애’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작가는 바로 이 인류애를 식민주의와 종교분쟁으로 얼룩진 참혹한 역사에 대한 미천한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다양함’으로 수용하여 사랑하는 것, 그것만이 인디오들을 착취할 대상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끌어안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인 16세기의 식민주의는 본격적인 유럽 열강의 침략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물리적 잔인성이나 규모 면에서는 분명 19세기의 팽창적 제국주의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대륙의 ‘발견’을 마치 새로운 물품의 ‘발명’인냥 소유권을 내세워 침략해 들어간 그 ‘뻔뻔함’과 폭력성은 3세기 후 제국주의의 밑거름으로 사용되었으며, 16세기의 식민주의 역사가 19세기의 제국주의 역사보다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성을 상기했을 때, 식민주의라는 치욕의 역사에 대해 작가가 제시한 ‘보편적인 인류애’라는 해결책이 다소 회의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 땅에서 인디오들이 당했던 억압과 수탈의 역사, 그로 인한 그들의 굴욕과 상처를 극복하기에는 ‘사랑과 이해’라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순진’하며 너무나 ‘손쉬운 방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는 잊혀진 과거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그 치욕적 역사에 대한 내부의 자성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의 제국주의를 거쳐, 거대한 자본과 군사력으로 인해 여전히 신식민주의의 시대인 현대를 살아감에 있어 그 악순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16세기의 식민주의를 되돌아보는 것은 분명 소중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프랑스의 브라질 개척 과정은 역사에서 철저하게 은폐되어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통한 역사적 성찰은 단순한 성찰을 넘어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해 진실을 규명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통해 시도된 이러한 내부적 비판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손쉬운 ‘면죄부’로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며, 단순한 지적 담론이나 일회적인 지적 유희로 끝나서도 안될 것이다. 그만큼 광기의 역사에 대한 ‘각성’ 뒤에 따르는 ‘실천적 힘’이 중요한 것인데, 텍스트 밖, 작가가 ‘국경 없는 의사회’ 및 기타 단체에 속해 인종을 넘어선 평화적 구호활동을 펼친 것이 단순한 ‘경력’을 넘어 보다 깊은 울림을 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콜롱브를 통해 작품에서 이루고자 했던 인류애, 자유와 사랑의 메시지는 어쩌면 16세기 당시의 식민주의자들이 아닌 신식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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