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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ypure님의 서재
  • 지복의 성자
  • 아룬다티 로이
  • 14,850원 (10%820)
  • 2020-02-03
  • : 1,264

이 작품은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잔혹한 학살과 폭압 속에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계급, 성(性), 종교, 인종(피부색)에 의해, 혹은 그 커다란 범주 안에서조차 더 세부적으로 끝없이 나뉘어 지고 구별되며, 결국 그러한 구별은 다른 계층을 향한 차별과 폭력, 증오를 정당화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절대적인 한 가지 기준(성 혹은 계급 등)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개별성’으로 인해 설명가능 한 것이지만, 이미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여 상대를 제거하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이들에게는 차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만이 중요하다. 이 작품은 획일적인 기준으로 타인을 끊임없이 ‘규정하려는 자들’과 규정될 수 없는, 혹은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자들’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 축에는 안줌과 틸로가 있다.


안줌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히즈라’(제3의 성)인데 아들로 키우길 원했던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여성’을 선택, 한 평생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안줌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렇기에 여성과 남성 모두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안줌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기준으로는 절대 규정할 수 없는, 명확하고 획일적인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며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안줌이 콰브가(히즈라들의 공동체)를 나와 무덤에 살게 되면서 결국 그 공간을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로 변모시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게스트 하우스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숙소이자 장례식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존의 모든 범주를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는 종국에는 수영장과 동물원, 학교까지 겸하며 여전히 진화중인데, 바로 이 곳에서 안줌이 그토록 열망했던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안줌이 엄마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단순히 여성의 정체성을 원한다기 보다, 오히려 생식능력으로 여성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양육’을 통해 그녀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인데, 이 작업을 하기에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안줌과 더불어 작품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인 틸로는 상류계급인 어머니와 불가촉 천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친어머니는 그녀를 버렸다가 입양하여 길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원칙적으로는 절대 결합할 수 없는 양 극단 계급의 합작품, 혹은 ‘혼합물’인 틸로는 태생적으로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쩌면 양 계급으로부터 소속을 거부당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안줌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그녀를 자유롭게 하는데, 이는 기존의 계급적 측면에서는 그녀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고 바로 이 불가능(규정할 수 없음)이 공고한 계급질서의 장벽에 미약하게나마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듯 닮은 삶의 궤적을 가진 안줌과 틸로의 삶은 버려진 아기 우다야(미스 제빈 2세)를 매개로 본격적으로 교차하게 된다. 우다야는 복잡한 시위 현장에서 버려지고, 아기의 거처를 놓고 안줌 일행과 다른 무리들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아기를 성공적으로 ‘유괴’한 틸로는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기는 경찰에 의해 학살된 무사의 어린 딸의 이름을 따 미스 제빈 2세가 되었다가, 생모의 편지가 전해 진 후에는 미스 우다야 제빈으로 불리게 된다.


우다야의 생모는 인도 공산당원인 레바티로, 그녀는 여섯명의 경찰에 의해 윤간을 당해 우다야를 낳는다. 처참한 폭력에 의해 태어난 아기였고, 아기의 존재 자체가 끔찍한 과거를 수시로 재현할 것이라 여긴 레바티는 ‘당연히’ 아기를 죽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우다야는 확고한 증오의 대상인 강간범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그 절망적인 유전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A와 B의 결합이 AB가 아닌,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C가 된다는 사실이 우다야를 참혹한 상처의 산물이 아닌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잡게 한다. 틸로가 사랑했던, 항상 치열하게 투쟁했던 무사는 결국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그 다음 세대에 의해 여전히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무사의 죽은 딸의 이름을 물려 받은 미스 우다야 제빈이 그 다음 세대를 상징함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미스 우다야 제빈은 생물학적으로는 레비타와 강간범의 딸이지만,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안줌의 딸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고, 틸로에게는 사랑하는 무사의 또 다른 딸로 존재할 것이다. 그녀는 안줌, 틸로와 마찬가지로, 단편적인 기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개인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채롭게 읽힐 수 있는 ‘확장된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권력을 쥔 자들이 휘두르는 획일성이라는 이름의 칼이 그어 놓은 뚜렷한 경계선, 그 테두리 밖에는 명확한 기준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수많은 개별적 인물들이 존재하며, 현재 진행중인 모든 이름의 전쟁은 각 존재의 개별성과 특수성, 그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종식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누구의 이념과 가치가 올바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을 차별해야 할 구실이 아닌 ‘공존해야 할 이유’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는 끝없는 반목과 분쟁의 처참함, 잔악한 인간의 면면으로부터 나 자신 역시 결코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이는 당연히 폭압적인 통합과 무자비한 단일화를 예상해서도, 그렇다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섣부른 화해나 봉합’을 기대해서도 아니었다. 두 주인공 안줌과 틸로뿐 아니라, 무덤에서 뛰어 놀며 생과 사를 넘나들 미스 우다야 제빈,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을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몸 속에서 체화해 왔을 게스트 하우스의 투숙객들, 마지막 순간까지 맹렬하게 싸워나갈 무사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결국 이 각각의 작은 존재들로 이루어지고 이들에 의해 느린 속도로나마 변화해 갈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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