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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le님의 서재
  • 장 그르니에
  • 7,650원 (10%420)
  • 1993-07-01
  • : 8,859
 
이상하게도 그 같은 비밀의 감정은
마치 끈질기고 숨 막히는 어떤 냄새,
심지어 창문을 열어젖혀 두어도 가시지 않는 냄새와 같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린 어떤 친구가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이 끌리는 쪽은 댄스홀이나 쾌락의 거리가 아니라 어둠이 내릴 무렵 여인들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건네 오는 한적한 골목길들이라는 것이었다. 
강렬한 감정치고 깊이 감추어진 감정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태리의 어느 오래된 도시 교외에 살고 있을 적에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포석이 고르지 못하며 매우 높은 두 개의 담장 사이에 꼭 끼여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곤 했다.
시골 바닥에 그처럼 높은 담장들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는 사월이나 오월쯤이었다.
내가 그 골목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이를 때면 강렬한 재스민과 리라꽃 냄새가 내 머리위로 밀어 닥치곤 했다. 꽃들은 담장 너머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꽃 내음을 맡기 위하여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두고자 했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언젠가 그 아이가 감동에 겨운 얼굴로 이 책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밴쿠버에 있었는데, 이 책이 너무 궁금해서 느려터진 밴쿠버 서점에서 찾느라 속이 터질 뻔했다. 물론 그곳에는 내가 찾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서점 컴퓨터만큼이나 느려터진 직원이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친절한 목소리로 이 책을 주문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래,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한참 남았으니까 주문해야겠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주문을 부탁했다.


알고 있었다. 느려터진 서점 컴퓨터, 느려터진 직원, 그리고 느려터진 배달 시스템. 그래도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기다리기로 했다. 하루, 이틀, 삼일, 기다리는 것조차 잊고 있을 때,
그렇게 3주가 걸려서 장 그르니에 <섬>을 원서로 갖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하루면 원하는 책을 모두 가질 수 있는 한국에서 기다림은 짧고, 그만큼 잊는 속도도 빨랐는데, 뭐든 느리게 처리하는 이곳 밴쿠버에서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만큼 소중한 것들이 늘어갔다. 책을 사서 들고 올 때는 또 얼마나 기뻤던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은유적이고, 사색적인 글 때문에
미친 듯 사전을 찾아 헤매야 했고
사전적 의미를 알더라도
그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사실 나 스스로도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그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선물하기 위해서
나는 또 한 번 느려터진 서점을 이용해야 했다.
이번에는 책이 오는 데 한 달이나 걸렸고,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책을 선물했다.
 
가끔씩, 한국어로 된 이 책을 사서 읽어볼까 했지만
이상하게 그저 막연하게만 이 책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사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어디선가 장 그르니에의 문장들을 볼 때면
반가워서 그때, 낯선 땅에서의 우정과
다시는 오지 않을 지나간 순간들에 대해 기억한다.

 

행복한 순간 또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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