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도 마지막에 스스로 말하지만, "글자 몇 개 쓴다고 사회가 바뀌겠어?"라는 말은 사람을 상당히 지치게 만들긴 한다. 오찬호는 그래서 계속 사회 비판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는 듯 하다.
다만, 그러한 사회 불평과 비만은 이제 시민들, 혹은 어느 정도 책 정도는 읽고 사회에 대해 걱정하는 무명인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내가 오찬호를 처음 만난 것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었고, 그 시절 나는 아직 팔팔한 20대 초반이었다. 모든 것에 쉽게 분노할 줄 아는 나이였고, 뭔가 정의감을 쫓아다니던 시기였다. 20대 특유의 열기와 활기가 있었으니 그의 책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마치 우리 한 구석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쾌감도 느껴졌다.
그렇게 오찬호의 글을 한 두개씩 찾아봤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에도 사회고발 책을 썼지만, 이제는 인상이 다르다. 10년인가. 아마도 그의 책을 처음 본 지 10년은 지났을 것이다.
세상도 변하고, 나의 생각도 여러 사상과 책과 맞물려 변해갔다. 탈진실 시대에 와 나는 포스트 모던의 구호에 질렸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 구호는 실상 수많은 정체성들로 쪼개지고 분열되면서 또다른 분파를 낳았고 그 속에서도 또 더 세세히 분류된 정체성들끼리 부딪치면서 '연대'라는 핵심 개념을 부숴버렸다. 이제 우리는 수많이 나뉘어진 개인적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해하고 배타성을 띤 그 집단 체제에서 서로 급진적 동화를 이루면서 타집단을 밀어내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정체성 정치란 개인의 죄책감을 건드릴 뿐, 그 행동의 결과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라는 것은 단순히 지젝이 마초이즘에 빠진 남자 철학자여서가 아니라, 실제로 정체성 정치가 이룩한 미미한 성과에 한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크 릴라도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이런 성과도 없는 지리멸렬함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 진영을 자꾸 분열시키고 옭아메는 사이비 정치에 불과하다 하였다. 실제로 민주 진영은 사분오열된 상태고, 그들의 정책은 누구하나 만족시키기 어려워졌다.
노동의 연대. 즉 더 큰 개념으로 우리를 그룹화 시킨다면 그것이 여성이든, 트랜스젠더이든, 장애인이든. 개인이 무엇이건 간에 노동의 정책 향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혜택을 공유하겠지만, 이제는 너무나 작은 파이를 이기적으로 서로 차지 하려다보니 모두가 모두의 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니 그 결과도 작은 파이의 부스러기일 뿐이니 누군들 만족할 수 있겠는가
여튼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찬호가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에서부터 그가 전형적인 정체성 정치에 천착하는 것에 실망하여 거리를 두긴 했으나
여전히 그가 말하는 날카로운 시원함과 노동문제에는 공감하기에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10년이 지나는 시간동안 오찬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사회 비판을 하는 외부자에 머물러 있다. 아무런 대안도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비판만 하는 그 자리에.
물론, 민낯이란 개념은 유용하다. 나도 여전히 구의역 비정규직 청년 사망사건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보냈으나 정작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대한 답을 내놓자 불공정하다며 청년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결국 비정규직의 위험한 환경이란 수전 손택이 말하듯, 그저 거기에 있는 고통을 지켜보며 사실 나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민낯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듯 이런 민낯을 바라보는 시선. 사회비판이나 불평따윈 소시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찬호는 학자이자 저술가이다. 그가 학자로서 성장했다면 이제는 좀 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한다. 단순히 사회에 비판의 메시지를 내는 것을 넘어서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없이 사회의 옆에서 쓴말만 자근자근 내뱉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도 결국 궤는 같았다. 그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에 공감하지 않는 갓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민낯만 찾는 것인가. 그 정도는 이제 우리같은 연구자는 아니지만 어정쩡한 지식 정도는 갖춘 소시민들에게 맡겨도 된다.
하지만 이제는 인플루어서 반열에 오른 학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더 적극적인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대한민국의 민낯을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발전 없이 그 자리에 남는 것으로 만족하는 오찬호의 민낯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