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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ax님의 서재
  • 토지 필사 노트
  • 박경리
  • 22,500원 (10%1,250)
  • 2026-07-15
  • : 5,395

누구나 그렇듯이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 히말리야 산맥의 최고봉인 에베레트산처럼 말이다. 도서 가운데도 그러한 최고봉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인 톨스토이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이 그것이다. 한국 작품으로는 단연 『토지』가 나에게는 에베레트산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토지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가 집필이 되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되었다. 원고지 4만 장에 달하는 거대한 세계다. 출간된 책 권수는 20권이다.무려 9680페지이다. 지레 겁먹을 수준이다. 벽돌 책도 이런 벽돌 책이 없다. 그래서 논평이나 칼럼, 서평에서만 접했지 실제 접하질 못했다.

그런데 『토지 필사 노트』가 바로 그런 독자를 위해 탄생하여 우리 앞에 왔다. 이 책은 박경리 전작을 출간하고 있는 다산북스가 선보이는 최초의 토지문화재단 공식 『토지』 필사 노트다. 토지 작품 가운데 중요한 엑기스만(147개의 글귀)을 기록하여 독자들을 토지의 깊은 세계로 인도한다. 어쩌면 이 필사가 토지를 읽는 계기가 될지 모르겠다.


이 책을 엮은이는 유선경 작가이다. 그는 서문에서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도 이와 같은 대하소설은 영원히 다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썼는데 『토지 필사 노트』가 그 거대한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도와준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토지』의 글귀들은 오래된 문장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새로운 문장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글귀』라고 엮은이는 말하는데 마치 오컴의 면도날처럼 인간의 본질과 세상의 모순을 명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인간의 욕망과 사랑, 연민과 애달픔을 정과 한으로 승화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위로와 지침을 건낸다. 즉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세상의 이치가 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토지 필사 노트』는 그냥 마음 가는대로 펼쳐 쓰면 된다. 목차를 벗어나 그날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을 쓰고 곱씹으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토지』가 품은 거대한 세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 문장들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즉 작품이 담고 있는 삶의 지혜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생기며, 명징한 상태로 전환된다.

이 책은 총 일곱 개의 주제로 엮어졌다.

1장 토지란 무엇인가?

2장 인간의 욕망과 사랑

3장 한국인의 한과 정

4장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5장 꿰뚫어 본 인간 심리

6장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한 장면

7장 세상의 이치가 어떠한가?

토지 작품 가운데 147편을 가려 뽑아낸 글귀들은 모두 인간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1장 토지에 보면 마지막 필사 구절인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태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오"라는 글이 나오는데 엮은이는 이 문장이 토지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이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규범과 달리, 만든 것도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 애초부터 있던 원리이다. 그 태생대로 살아갈 때 삶은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가 공식일 수밖에 없다"는 원리와 한계를 인정하면 삶은 다르게 보인다. 아무리 이치를 말해도 인간은 결국 자유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결국 이러한 생각은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즉 다른 이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인간은 남들은 나와 어떻게 다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래서 관통하는 이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토지는 그러한 깊은 삶의 이치를 체험 속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들려준다. 한 순간에 듣고 마는 휘발성 문장이 아닌 한 생애를 처절하게 살아가면서 부딪힌 문장들이 이 토지에 실려 있다.

특히 『토지』는 흔히 ‘우리말의 보고’라 불릴 정도로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풍부한 어휘와 살아 있는 말맛, 치밀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이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토지』를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문장의 교과서’라고 말한다. 낯설은 경상남도 방언은 구수하다못해 매우 인간적인 단어로 들린다. 한 자료를 보니 생전에 작가가 평사리를 무대로 선택한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만석지기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드넓은 평야가 있으며, 지리산이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가 뒷받침이 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쓸 토속적인 언어, 경상도 방언을 쓰고 싶어서 섬진강을 낀 경남의 끝자락, 평사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독자는 각 주제마다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2장 인간의 욕망과 사랑, 4장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5장 꿰뚫어 본 인간의 심리 부분에서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몇 문장을 실어보면...(아니 많은 문장을 실어 본다)

2장 인간의 욕망과 사랑

23. chapter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것은 돈, 오직 돈이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것은 돈, 오직 돈이었다. 그러나 비참했던 이력 때문에 버림당하지 않는 것만이 살길인 줄 믿었던 지난날의 임이네는 아니었다. 남편 없어도 돈 있으면 산다는 배짱이었다. 용이보다, 아니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것은 돈, 오직 돈이었다. 돈에게만 그는 그 자신의 장래를 걸었다.

이 세상 마지막이 온다 하여도 혼자만은 살아남을 것 같은 왕성한 생명력, 불모의 바위틈을 피 흘려가며 기어오르는 생명에의 의지, 무서운 힘이었다. 그런 뜻에서는 본시부터 임이네는 거인이었다.

남편 자식도 갖고, 국밥집도 갖고 월선이도 죽어버리고 미운 사람들도 다 죽어버리고 그래주었으면 임이네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참으로 욕망 무한, 슬픔 없는 목숨이며 비렁땅 꽃 한 포기 새 한 마리 없는 황막한 인생이다.

25. chapter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물론 봄의 환히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과 자리, 혹은 공간이라는 엄련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26. chapter 혼자 살자니 적막강산이고

"함께 살아도 편허질 않고 혼자 살자니 적막강산이고

참말이제 워째 살아야 할지 모르겄어라우"

32. chapter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게야

공노인은 두메며 길상이며 월선이 봉순이 모두 기찬 얘기책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다 기차다.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게야. 인간의 인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 있나.'

4장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65. chapter 마음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매나 좋노

"세상에는 하고많은 일이 있고 어리석은 놈 등쳐서 깝데기 벳 기묵을 재간도 있는데도 와 하필이 이 짓을 하고 있제?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석아, 우리같이 설운 놈들이 마음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매나 좋노. 굽히도 굽히는 것이 아니요 기어도 기는 것이 아니라. 안 그렇나?"

67. chapter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 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 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5장 꿰뚫어 본 인간의 심리

86. chapter 넌 지나치게 순수한 것을 원하고 있다

"지금의 너에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그런 나이지만 여자, 술, 담배 하면서 크게 타락한 것같이 생각하고 또 남들도 그리 생각은 하겠으나 실상 넌 지나치게 순수한 것을 원하고 있다. 물론 너 어머니 성질이 남다른 것을 알긴 알지. 그만큼 너 자신도 성질이 남다른 데가 있는 게야. 순수한 것이 아니면은 다 부숴버리고 싶은, 그래서 너 자신을 짓이기고 있는 게야. 아무튼 지금 내 생각으론 이 어려운 고비만 넘기면은, 잘될 것 같다."

87. chapter 칼을 뽑지 못하고 바늘을 뽑았다

늘 언행에 중심이 잡혀 있고 심지가 꼿꼿한 윤도집인데 어찌 하여 환이에게만은 매번 신경이 곤두서게 되고 그러면은 신경이 바늘 끝으로 변하여 상대방을 찌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윤도집은 환이의 그 살기 어린 야유에 부딪친다. 살기나 야유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칼을 뽑지 못하고 바늘을 뽑았다는 의식이, 소인배라는 자의식이 그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에 대한 능멸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한 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매번 환이에 대해서만은 늪과도 같은 도전의 유혹에 빠지는 건지 윤도집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증오심도 없으면서.

94. chapter 무서운 게 아니오 외로운 거요

"병자만 목에 칼 걸어놓고 사는 건 아니잖소. 산다는 것은 목에다 칼 걸어놓은 거요. 사는 것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성님 말이 맞소. 항상 칼든 놈이 뒤따라오는 것 겉은 생각을 했인께요. 이서방이 허약해져서 그 생각을 많이 하는 깁니다."

강쇠가 거든다.

"무서운 게 아니오. 외로운 거요. 뭣이든 거머잡고 싶은 심정이오."

96. chapter 착한 사램이라고 어디 나쁜 마음 안 묵건데?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네라. 다 처지에 따라서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하고, 제 살기가 편하믄 머할라고 남을 원망하겄노, 안 그렇나? 사흘 굶으믄 엔간한 사람이 아니믄 맘 잘 못 묵기 쉽지.(…)

착한 사램이라고 어디 나쁜 마음 안 묵건데? 그라믄 부처님 안 되겄나? 사램이란 하루에도 몇 분은 나쁜 마음 묵지. 나쁜 사람도 하루에 한 분쯤은 좋은 마음 묵어보고 지은 죄도 무섭아해보고." 늘 그러던 봉순네였으나 귀녀에게 대해서만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지는 그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염치는 배부른 사람이 챙기는 거지, 너처럼 그랬다가는 굶어 죽을 기다."

"그거는 그렇지 않다." 호야할매는 끼어들었다.

"아무리 배가 고르고 기찹아도 염치를 채리야만 그기이 사람이제.

있고 없고가 상관없는 기라. 있다고 해서 어디 염치 채리더나?"

104. chapter 늙은 탓이 아니야 세월이 달라진 게야

김환과 길상이 나간 뒤 이동진은 오열한다.

"이 사람아, 석운(최치수의 호). 나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 네. 참말로 모르겠네. 이십 년을 방황하였건만 나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생각은 호박오가리처럼 쭈그러들었네. 저네들은 싱싱 한 호박 넝쿨처럼 사방에다 줄기를 뻗고서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일세. 어떻게 그리 변신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일세. 철사 같은 그 신경의 줄이 나를 휘감더군. 옴짝할 수 없게시리 나를 휘감더군.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한갓 감상이요, 그네들이 추하다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었네. 내 노여운 음성은 허울만 남은 호랑이 울음이었고, 그네들의 맞서는 음성은 발톱으로 먹이를 찢어발기는 이리 떼의 울음이었네. 이 사람, 석운, 늙은 탓이 아닐세 늙은 탓이 아니야. 내 나이 이제 오십을 넘겼을 뿐인데 세월이 달라진 게야. 그리고 우린 이조 오백 년의 무거운 세월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하기야 살아남으려면 의관이 무슨 소용이겠나. 맨발로 뛰어야 할 때는 맨발로 뛰고, 물구나무를 서야 한다면 물구나물 서야 하고. 한데 그게 안 되거든."

107. chapter 그 후회스러운 날들이 그립단 말시

"지난날을 생각허믄 모두가 다 후회스러운 일뿐인디 그 후회 스러운 날들이 그립단 말시."

좋은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선하거나 악하거나, 고귀하거나 천박하거나, 청렴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생김새만큼이나 마음보들이 각양각색인 600여 인물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회의감도 든다. 결국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를 비추기 때문이다. 안 그런척 하지만 토지의 각 인물은 내 내면을 비춘다. 따라서 『토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한다. 말맛이 살아 있는 이 문장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마주하는 시간이 되었다. 정말 원고지 4만 장에 달하는 문장들을 일일이 읽어봐야겠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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