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인체에 대한 궁금증에서 보게 된 책이다. 인간의 몸을 해부해서 본다는 것은 호기심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기에 인체의 신비전도 그래서 비롯된 전시라고 본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인체에 대한 해부 삽화이다. 놀라울 만큼 세밀하고 적나라하며 아름다운 해부 삽화가 심도 있게 그려져 있다. 여는 글에 나오는 첫 그림 두 장은 인간이란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삽화이다. 특히 케임브리지대학교 해부 극장(1815)이란 그림은 인간 해골을 해부용 테이블 위에 달아 놓았는데, 이 해골은 수업용 교구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해골이라면 정말 섬찟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해부학자들이 죽음을 깊이 생각하며 인간 실존에 대해 무언가 큰 인사이트를 받고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해골은 메멘토 모리 즉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뜻의 상징이었다)
여느 글을 보면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가 매우 잘 되어 있다. 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여느 글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이 부분을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책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해부학은 수천 년 전 기록이 남아 있는 아주 오래된 과학이다. 이 책 『해부학자의 세계』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전쟁 중 상처 처치법을 설명한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로 시작해 21세기 기술 발전을 반영하는 『근골격계 MRI』의 최신판, 오랫동안 사회가 해부학을 둘러싼 미신과 불신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여주는 아동서 『인체 해부학 및 생리학 컬러링북』까지 5000년 동안 해부학자의 서재를 채워온 150권의 책을 다룬다. 5000년 동안 해부학자의 서재를 채운 책 속에는 인체 이해, 예술적 기법, 사회 변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부학 지식이 처음 적용된 곳은 고대 전쟁터였다. 문명 간 전쟁은 인체를 향한 호기심의 첫 번째 원천이었다. 그 이유는 역사에서 자주 그랬듯이 당시에도 심한 외상과 부상이 살아 있는, 또는 죽어가는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물론 미라를 만드는 이집트의 전통에서도 내부 장기에 접근했지만 그건 과학이 아닌 의례의 차원이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사람의 몸을 가른다는 것은 영혼의 보관소를 침해하는 행위로 철학적으로나 법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p22
그 이유는 과학적으로 신체를 보기 전에는 영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사상가들이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영혼의 개념이 탄생하게 되는데, 해부학 초기에 보면 "영혼은 어디에 머무는가? 이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해부학적 서열을 따진다면 심장이 머리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하는 것이 중요한 논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시기에 부상병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해부학 책이 출간되었다. 특히 5세기에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서유럽에서 야만의 시대가 도래할 무렵, 동방에서는 새로운 배움터가 세워지며 해부학에 대한 막대한 기여를 한 이슬람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대가 저물어가는 시기에 서양 학자들은 에스파냐의 과거 이슬람 학술기관을 찾아가 그곳에 소장된 문헌들을 라틴어로 옮겼다. 20세기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해부학 삽화집이라고 일컬어진 출판물들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자들이 해부학 이론에 대한 종교의 입김에서 벗어나기까지 많은 이의 용기와 고난이 있었다. 특히 중세에 카톨릭교회는 사회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해부학자 미켈세르베트 같은 경우 교회의 교리에 도전했다는 괘씸죄로 자신의 책과 함께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러나 과학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교회와 국가에서 서서히 분리되었다. 근대 해부학은 16세기에 탄생했는데 초기에 진리를 향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갈증에 덩달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인체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외과의사만 아닌 조각가와 화가도 인간의 형태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해부 구조를 배웠다. 심지어 해부 기술을 익혀 시신에 직접 칼을 댔다.
그런데 해부학이 인기를 끌었던 17~19세기에는 해부용 시신이 부족하여 시신 도굴꾼이 기승을 부려 사회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를 계기로 해부 관련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그런중에 17세기 해부학자 마르첼로 말피기는 자신의 몸을 부검해달라는 유언을 남겨 최초의 해부용 시신 기증자가 되었다.
해부학이 철학에서 과학으로 넘어감으로 우리는 우리 신체에 대한 실제적인 비밀의 문을 열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신체 이해를 과학으로 뭉게 버린 것이다. 해부학의 재건자 몬디노는 메우 훌륭한 해부학자이다. 그는 해부학을 계통학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사람 몸을 해부한 사람이다. 몬디노가 1316년 저술한 『인체의 해부』는 사람해부학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책으로, 1543년 베살리우스의 『사람 몸구조에 관하여(파브리카)』가 나올 때까지 200년 동안 유럽에서 표준 교과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하나의 예를 들면 자궁에 대한 심각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몬디노는 이미 볼로냐에서 논란을 불렀던 옛 이론을 끌고 왔는데 중세 초기에는 자궁에 7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태아가 발달한다고 믿었다. 오른쪽 3개는 남자 아기, 왼쪽 3개는 여자 아기용이며, 가운데 있는 방은 자웅동체가 잉태될 경우를 대비해 남겨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오해는 해부로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몬디노가 해부를 수행하기는 했지만 공개적인 시범은 해부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점점 시대가 변화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또한 현미경의 발명으로 모세혈관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윌리엄 하비의 폐쇄 순환계 가설이 검증되었고, 내시경, 마취술과 냉장술, 시신 방부 처리의 발명은 해부학 연구에 기여를 하게 된다. 사진술의 발명과 19세기에 컬러 인쇄술의 발달은 더욱더 해부도의 실재감을 더해주었으며, 정교해졌고, 원하는 부위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발전은 17세기 현미경부터 19세기 초의 내시경까지, 엑스레이에서 현재의 CT와 MRI까지 인체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기술의 발전을 이루어 해부학의 시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재는 스켄된 이미지에 인위적으로 색을 입혀 세부 사항을 강조할 수도 있다.
해부학의 역사는 인류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역사이기도 하다. 반면에 해부학은 인간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신체는 과히 신묘막측하다. 해부학을 아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해부학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인간일까하는 생각을 다시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신체가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신체에 깃든 영혼 때문은 아닐까?
끝으로 해부학의 역사에서 자주 간과되는 해부학자의 실험실이 되었던 몸과 그 영혼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없었다면 해부학의 발전은 한없이 더뎠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 숨 쉬던 진짜 사람이었다. 이들에 대해 빈 의과 대학의 설립자 카를 폰 로키탄스키(1804-1874)가 쓴 모든 의대생의 필독서가 된 『병리해부학 편람.1876』에 기록된 글 하나를 보고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당신이 이름 모를 시신 위에 허리를 숙이고 딱딱한 메스의 칼날을 들이댈 때, 그 몸은 두 영혼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는 그를 가슴으로부터 아끼고 보호한 사람의 믿음과 희망으로 키워졌다. 어린이였을 때, 젊은이였을 때, 그는 당신과 같은 꿈을 꾸며 미소 지었다. 그는 사랑했고 사랑받았으며, 행복한 내일을 희망하고 소중히 여겼고, 먼저 떠난 이들을 그리워했다. 이제 그는 이 차가운 슬레이트 위에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이 하나 없고, 기도해줄 이 하나 없이 누워 있다. 그의 이름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거침없는 운명이 그에게 인류에게 봉사할 힘과 위대함을 주었음을 기억하라.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