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모된 감상기 中>)라는 나혜석의 주장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고, 그로부터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구는 암암리에 공감을 얻을지언정 스스럼없이 대중에게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닌 듯하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학습된”, “만들어진” 모성이라는 탈-신화화 작업은 여성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이뤄졌으나 아직까지 이성애중심주의/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공고한 사회는 내 몸을 불살라, 내 마음을 바쳐 아이를 전적으로 사랑하기를 요구한다. 산고와 육아를 겪는 여성의 신체는 여성 자신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것이 아닌 잉태한 아이를 사랑으로 낳고 기르는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일관된 지시체로 호명되는 부재지시대상(absent referent)으로 존재하거나, 그 경험 총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리는 비체(abject)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체성은 뭉뚱그려졌다.(가제본, p.169)”
<네 눈동자 안의 지옥> 속 캐서린이 겪는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람마다 출산경험은 제각기 다르겠으나, 적어도 주인공의 출산은 그다지 순탄해보이지는 않는다. 방광 카테터, 소변주머니, 마취주사, 패혈증 등의 장치는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숭고한 과정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과정에 더 어울려 보인다.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신체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상황에 필연적으로 놓인다. 즉,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지향점이 불일치하는 지점에 당착한다. 나와 아이의 분열, 나와 신체의 분열, 자아와 신체의 분열... 무수한 분열들은 이윽고 자아와 정신의 분열을 가져오고, 그렇게 캐서린은 정신병원에 실려 온다. 산후정신증은 ‘예외적인 사례’일지도 모르나, 출산 전후에서 겪는 분열은 아마 모든 산모들이 겪는 일이리라. 어쩌고 보면 임신/출산/육아는 분열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고, 홍콩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영국에서 남편과 살게 되는 노마드적인 주인공의 삶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교차된다. ‘3세계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개별성은 ‘디아스포라’라는 개별성과 만나 역설적으로 여성이 겪는 현실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폭력을 감내하며 유년시절을 보낸 미국,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해 “매 맞는 여자”가 되어버린 홍콩, 폭력의 경험에서 벗어나 가정을 꾸려나갈 단짝을 찾는 영국.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한국의 미신과 풍속, 설화를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 근저에 있는 것들은 희생, 슬픔, 고통 따위의 것이며 이들을 모두 뭉뚱그려 말하자면 한(恨)이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고통받아야 했다.”(가제본, p.40) 미국에서, 홍콩에서 겪는 그의 고통은 한국 여성들이 겪는 고통들의 연장선이다.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의 폭력성, 여성을 소유물로 취급하던 전 남자친구의 폭력성은 근현대 한국문학에서 대두된 ‘매 맞는 여자’의 테마를 연상케 한다. 즉, 가부장제 하에서 고통 받던 한국 여성의 ‘매 맞는’ 형상은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중첩되어 여성 보편이 겪는 폭력을 표상한다.
자신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겪는 출산과 폭력은 이리저리 떠도는 이산의 삶과 닮아있기에, 산모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디아스포라의 유목민으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중첩된다. 어디에도 발 붙일 데 없고, 어디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 경험은 가히 한국적이기 그지없는 고통의 정서, 한으로 귀결된다. 바야흐로 모든 여성은 한을 품고 있다, 언제 분열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3.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임신은 종을 위하여 개인의 육체가 임시로 기형이 되는 것”(<성의 변증법>, p.287)이라 주장했다. (뭐, 이 문장에 담긴 비장애중심적인 시각은 차치하고.) 나혜석은 단 한명의 여성이라도 자신의 글을 읽고 공감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되었다는 생각으로 펜을 들었다. 뉴미디어의 시대, 누구나 글을 읽고 쓸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성들에게 자신의 신체는 알지 못하는 “검은 대륙”이다. 그러나 그 검은 대륙의 탐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글쓰기이며, 글은 다른 이에게 이어져 연대를 가능케 한다. 아직도 <모된 감상기>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이민자 여성이 그와 동일하게 자신의 ‘모된 감상’을 펼쳐놓고 있는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발화, 많은 경험들이 더 쓰여지고 읽혀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