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입MD일 때,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업무가 거래처 협상이었다.
당시 패션회사의 MD 체계는 기획MD, 생산MD, 영업MD로 별도 부서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기획MD가 생산MD와 영업MD의 역할을 통합해서 수행했다.
기획MD는 "사장 대신 사업하는 직원"으로 불렸고, 상당히 넓은 업무범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품기획과 생산, 유통, 성과분석까지 "제품라이프사이클" 전체를 관리하는 "프로젝트 오너"역할이었다.
"제품라이프사이클" 전체를 관리하다보니...
각 사이클 마다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와 협력업체를 관리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타부서 직원(생산/영업/물류/재무부서 실무자)"과 "협력업체 대표자"를 대상으로 일개 신입MD가 업무지시와 조율을 해야하는 것이다.
말이 관리지, 실제는 당근과 채찍을 무기로 협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당근"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당근"이 서로 달랐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로 인식하는 "당근"이 다르면, 협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 경험이 부족했던 신입MD로써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협상 대상자보다 경험이 부족한) 스타트업 대표님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B2B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스타트업은 "협상"능력이 바로 "영업능력"이다.
바꿔말하면 협상능력이 부족하면, 영업 자체를 못한다는 것이다. (돈을 못번다.)
이런 대표님들에게 효과적인 협상(영업)을 할 수 있도록, 템플릿을 활용해서 가이드를 해드리고 있다.
(좀 더 혹독한 협상조건을 감안하여 경쟁입찰을 전제로 가이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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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는 쉽게 가이드한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완성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항상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에 협상 프로세스를 다룬 책이 출간되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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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아본 느낌은 약간 기시감이 느껴졌다.
일단 두툼한 검은색 양장본에 "비즈니스 협상 모델의 탄생"이란 부제가 붙은 것이...
스타트업 창업분야의 베스트셀러인 "비즈니스 모델의 탄생"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었다.
물론 다루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책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나 비주얼씽킹을 도입한 점, 템플릿(캔버스)을 중심으로 설명한 점 등은 비슷했다.
아마도 저자 또는 출판사에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장에서 검증된 책인 "비즈니스 모델의 탄생"을 오마주한 것 같다.
덕분에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실용서는 단순히 읽기만해서는 절대로 실무에 적용할 수 없다.
("비즈니스 모델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만,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를 제대로 작성한 창업자는 많지 않다.)
저자는 실무에 활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책의 뒷부분에 "실전 사례 연구" 챕터를 추가해서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자신의 케이스에 적용하면서 고민해보지 않으면, 성과를 얻긴 어려울 것이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인트로 부분에서는 "비즈니스 협상"에 대한 개념과 원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협상 준비와 최적화"에서는 이 책의 핵심인 "8블록 협상 모델(캔버스)"를 단계별로 소개하고,
마지막 챕터에선 "스터디케이스"로 활용할 수 있도록 "협상 시나리오"를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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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이 책의 핵심인 "N8M 협상 캔버스" 템플릿을 따로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피스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쉽게 그릴 수는 있지만... 템플릿 파일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역시 아쉽다.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의 경우,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선스로 스트래티저 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 ◈ ◈ ◈
본격적인 "8블록 협상 모델"을 소개하기 전에
"협상"에 대한 기본 개념과 "이상적인 협상 모델"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주먹구구식의 "개인적 경험과 감에 의존한 협상"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협상 프로세스"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협상 모델이 네트워크에 의지한 고객 발굴과 가격협상이 주가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 기반의 체계적이고 이해관계자 모두 "상호 윈윈(win-win) 협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 부분은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MD로 일하면서 협력업체와 매입 협상할 때는...
목표 사입가(베스트/워스트 단가)를 산출한 후, 그 거래처와 타 부서 MD들과의 거래실적, 품질점수 등 자료를 가지고 협상했다.
단가는 제품과 생산량에 따라 결정되지만, 납기일과 납품 방식, 작업 우선순위 등은 협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데이터가 많을수록 다양한 옵션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오래 전부터 ERP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협력업체는 제품을 납품하고 얼마나 입금되었는지 정도의 데이터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항상 내가 이끌어 갔고, 대부분 내 의도대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협상 대상자는 무조건 "협력업체 대표자"와만 협상했다.
합의한 내용은 그 자리에서 확정해야만, 이후 대표이사 결재까지 수정사항 없이 빠르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데이터 기반의 협상 시나리오가 협상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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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8블록 협상 모델"을 소개한다.
"8블록 협상 모델"은 협상 프로세스를 8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 수행과제와 목표, 아이디어 도출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는 "1차 협상 준비 단계"로 표현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협상 준비 1단계"가 맞을 것 같다.
실제 협상을 시작하기 전, 여기 제시된 모든 단계를 전부 거친 후에야 "협상안"을 제시하고 조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협상 모델에 사용되는 전문용어가 있는데....
ZOPA(Zone of possible agreement)는 협상 당사자간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범위"를 의미하고,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는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을 경우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 "플랜B"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론 이 8단계 프로세스 중에 가장 중요한 단계는 "1블록 현황 분석"과 "5블록 욕구 탐색"이라고 생각한다.
8블록 모델에서는
① 가장 중요한 협상 전략을 수립하고,
② 협상 상대의 숨겨진 욕구를 탐색한 후, 추가 제안/보완을 하는 프로세스이다.
반면에 내가 활용하는 프로세스는
① 제안 요청 내용을 분석하고,
② 협상 상대기업의 모든 이해관계자(합의결재자)의 진짜 니즈를 파악한 후,
③ 기존 거래업체의 솔루션과 경쟁자의 솔루션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④ 자사의 솔루션을 제시하는 프로세스이다.
접근방식이 약간씩 달라보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최종 협상안을 도출하기 위해선, 협상 상대의 숨겨진 니즈(욕구)까지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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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8블록 협상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현황 분석"이다.
누군가와 협상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거래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 강렬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즉, 협상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안해야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솔루션 영업"이다.
협상 상대방에게 매력적인 솔루션을 제안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현황 분석"단계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그들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체 프로세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협상 상대방은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나 치부를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
문제나 치부를 노출시킬수록, 협상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황 분석"을 위해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해야 한다.
경쟁입찰의 경우, "RFP (Request For Proposal, 제안요청서)" 분석부터 시작하고...
수의계약 등은 협상 상대방의 이해관계자(직원 또는 거래처 등)들로부터 직접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책에서는 간단한 질문세트를 예시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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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블록 협상 모델"의 마지막 블록은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최종안 도출" 단계를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협상"은 누가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전의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직장인 신분으로 "경영진/상사"의 지시사항을 거부할 순 없었다.)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최종 협상안"은 그야말로 꿈같은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협상이 누군가 이기고 지는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꾸 패배하면 손해를 볼 수 밖에 없고, 결국은 망하든지 떠나든지 할 것이다.)
그리고 거래를 해왔던 상대방이 떠난다면, 나는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야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기적인 협상을 하는 업체(담당자)"라고 입소문이라도 나면, 새로운 거래처를 찾기도 어려워진다.)
이것이 바로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협상과 거래"가 중요한 이유다.
이 책에서는 이상적인 "최종 협상안"이 가져야할 요인을 5가지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하나도 허투루할 수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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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t : 협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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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 상대하는 일"이다.
즉, 누군가와 "협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협상은 누군가와 가치를 주고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만큼 협상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번에 읽어 본 책 "에잇 블록 협상 모델"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협상 프로세스"를 체계적으로 설계함으로써,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책이다.
B2B 또는 B2G 비즈니스 기업 담당자와 대표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B2C가 이미 정해진 옵션을 중심으로 대중에게 가치를 교환한다면...
B2B나 B2G 기업은 협상과정을 통해, 가치(솔루션)를 조율하고 커스터마이징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면, 내가 예전에 경험했던 사례를 기잔으로 "N8M 협상 캔버스"를 그려보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겠다.
개인적으로 어떤 주제를 체계적으로 풀어낸 "매뉴얼같은 책"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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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