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제로베이스 님의 서재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객관적 실증주의와 주관적 관념론의 종합을 시도한 역사서이나, 역사가의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역사 상대주의를 초래했다는 비판과, 역사적 필연성을 맹신하는 진보주의 사관이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비판을 받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1. 칼 포퍼(Karl Popper)에 의한 '반증 불가' 및 '역사주의' 비판


1)진보주의의 반증 불가능성: 카가 말한 역사의 진보(또는 발전)는 미래의 결과를 보고 과거를 재단하는 목적론적 사고이다. 이는 칼 포퍼가 과학적 지식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한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을 결여하고 있다. 특정 역사관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경험적 조건이 없기 때문에 과학적 검증이 불가한 '도그마'나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는 지적인 것이다. 


2)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의 위험성: 포퍼는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 등을 통해 역사는 미리 정해진 법칙이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상(역사주의)을 강하게 비판했다. 카의 역사관은 자칫 역사의 진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2. 제프리 엘튼(G. R. Elton)의 '위험한 상대주의' 비판


1)'과거의 사실'과 '역사적 사실'의 자의적 구분: 카는 역사가가 선택한 것만이 역사적 사실이 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영국의 엘튼 경은 저서 <역사의 실천>을 통해 카가 사실과 역사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분리함으로써, 역사가 마음대로 사실을 조작하거나 변덕스럽게 역사를 서술할 여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2) 객관성 파괴: 엘튼은 역사가란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철저히 사료(과거의 사실) 자체를 존중해야 하는데, 카는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정당화함으로써 역사를 객관적 학문의 영역에서 끌어내렸다고 지적했다. 


3.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과 '승자독식'의 역사관


1) 필연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 카는 본래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정치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학자였다. 그의 역사관에는 필연적인 역사 발전 법칙이 내재해 있는데, 이는 복잡한 우연과 인간 개개인의 자유의지보다 구조와 거대한 흐름을 과도하게 우대한다는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2) 패배자에 대한 냉담: 카는 "역사는 승자들의 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패배자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이나 재난을 '진보의 비용'으로 치부하는 관점을 보인다. 이는 도덕적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낳았다. 


4.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가치 상대주의' 위험성 경고


결정론이 낳는 도덕적 무관심: 이사야 벌린 등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카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필연성)을 강조하는 사관이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을 희석시키고, 역사 속에서 자행된 비극마저도 '진보의 필연적 과정'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5. 실용주의적 진리관과 승리주의(Whig History)


1) 성공한 것 중심의 역사 서술: 카는 역사의 진보에 기여했거나 '성공한' 사건과 인물만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으로 유명하다.


2) 패자에 대한 소외: 이러한 서술 방식은 역사 속에서 실패한 운동, 소수자, 혹은 주류에 저항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지 못한 무가치한 것'으로 묻어버리는 '승리자의 역사관'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6. 서구 중심주의와 근대화론적 편향


1) 선형적 진보관의 한계: 카가 말하는 '진보'의 기준은 서구 사회가 겪은 산업화, 민주화, 근대화의 모델에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 


2) 다양성 간과: 서구적 가치관을 인류 보편의 발전 법칙으로 일반화함으로써, 비서구권 사회의 독자적인 역사적 전개 과정이나 가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서구 중심적 서술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7. 도덕적 판단의 유예와 결과주의


과정의 폭력 정당화: 카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당대의 도덕적 기준으로 엄격하게 심판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진보나 목적 달성을 위해 자행된 폭력(예: 스탈린 체제의 숙청이나 산업화 과정의 희생)을 비판하지 않고 방조하거나 합리화하는 결과주의적 서술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카는 역사학의 '객관성 신화'를 깨뜨리는 데는 일부 기여했지만, 그 대안으로 제시한 '진보를 향한 목적론적 해석' 또한 오늘날에는 또 다른 편향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책 <역사란 무엇인가>는 한때 정치적 좌파 진영에선 이 책을 역사적 진보를 예견하는 바이블로서 추앙하기도 했으나 (카는 한때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다),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에 의한 검증"이 부실한 역사관으로 지목되어 그 허구성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믿고 싶은 자들에 의해서만 신봉되는 이념적 도구 내지는 말의 성찬에 불과한 개념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