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테일 2026/08/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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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들판
- 마거릿 주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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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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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시월의 이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의 할아버지는 애국지사다.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운 자유의 투사다. 보수적인 양반 지주 가문에 수치를 안긴 장본인이 아니라 영웅이자 순교자이다. 44"
공교롭게도 요즘 세상은 한 엘리트 집안의 친일행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선대부터 좀 산다고 하는 집안들이 대체로 나라 팔아먹고 돈받고 땅받고 입씻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없이 효율을 따져 빨리 성장하고자 했던 부작용이 아직도 여전하다. 선대가 쌓은 죄값으로 부유히 자라 유명인이 된 후대가 방송에 나와 몇대를 이어온 자신의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장면은, 그 개인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에 급급해 짧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고, 우리사회에는 심각한 역사의식 부재와 물질만능적 사고의 천박함을 경고했다. 피로해진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마주한 '비밀의 들판'은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은,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말하고 있었다. 부유함과 위명으로 화려하게 덮어씌운 거짓 대신,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증명하는 가족의 역사이자 개인의 삶이었다.
'나-주혜'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여겼던 기록은 사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폐수술(4년의 수감 생활 이후 결핵을 앓은 할아버지로부터 감염된 오랜 지병으로 인한) 이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무기력해진 아버지의 일상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찾아 기록하려 했으나 멈춘 채 두었던 계획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른다. 그는 전화통화 조차 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부 글로 써달라 요청한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존재는 인생 전반에 걸친 수치와 멍에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왜 수감되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자신이 범죄자의 아들이란 생각에 제대로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내왔다.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니라 잊혀졌던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아내조차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고 평(224)할 정도로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다.
역사,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누가 기억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만 그와 그 자신에게서 이어져나간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비밀의 들판'에서는 아버지-은설의 기록도 함께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 역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비록 그의 삶에 비장한 저항이나 사상, 운동 같은 것은 없었을지라도 내가 그를 알고 기억하기 위해서. 굉장히 세세하고 때로는 늘어지거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자세했는데도, 누군가의 삶을, 가족의 역사를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짧고 간명했다.
" 할머니는 애국지사의 아내였다. 평생토록 남편을 잊으려고 애쓴 뒤에, 결국 영원히 남편 곁에 눕게 되었다. 354"
더불어 가족의 기록은 오랜 시간동안 침묵해온 할머니의 증언이기도 하다. 처음엔 할머니의 침묵이, 남편과 관련된 자료를 전부 없애버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살아남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명예로웠을지라도 가족들에게 남긴 상처는 적지 않았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며 아내는 고향 가족의 집에 남겨두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남자,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첩을 들이려는 남자, 수감되어 있던 동안의 일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아내 뿐 아니라 두 아이도 책임지지 않고 죽은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애국같은 비애와 의기 넘치는 큰 뜻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나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누가 묻지도 않고, 어디에 말할 곳도 없어 어리고 철없는 손녀 옆에서 옛이야기 들려주듯 풀어내던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었다. 오봉이니 쓰메끼리 같은 사소한 일본어들을 섞어서 쓰던, 전쟁의 잔인함과 피난길의 공포를 기억하던, 시집살이의 설움을 지워내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소녀(69)라는 이름을 가진 금순 할머니의 삶과도 닮아있었다.
저자가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가끔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인 가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미국에서 채워넣은 사람. 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넌 어디 출신이야?" 14/387)'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며, 존재의 한가운데에 난 구멍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의 고백이 함께했다.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던 그의 내면이 불편할수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음을 느꼈다. 처음엔 잊혀진 독립운동가였던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워 다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되돌리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가족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상실을, 자신이 누구인지, 왜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실수하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뇌해야 하는 방황을 끊고자 한 사람의 노력이 더 크게 보였다. 과거와 역사가, 가족으로 이어지는 경험과 삶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비밀의 들판'은 말하고 있다. 이번 주말 읽기 좋은 책이다.
"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386"
* 유니클로 광고 ‘Oh My God, I can't remember that far back!’ ‘8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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