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의 밤
테일 2025/12/1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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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가의 밤
- 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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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 - 2025-12-05
: 1,210
표지 날개 안 쪽에 적힌 작가의 이름과 소개를 보다 프리다이버라는 말과 수경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단 생각을 무심결에 했다. 그 이름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는 책 안에서도 계속될지는 몰랐다. 민지라는 이름이 민저라고 잘못 올라간 탓에, 모든 것이 그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조용한 죽음을 읽다 다시 그럼 수경이란 이름 때문에 작가는 프리다이버가 된 것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프리다이버로 꼬리를 문 생각은 다시 프리다이버 선수로 그려지는 아빠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담아내고 있구나 싶었다.
이런 류의 슬픔에는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너무 슬퍼서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텐데 나이를 먹을수록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속으로 핑계를 대보았다. 평이하도록 담담한데, 온통 낯선 이별들이 제 이름을 말할 때면 코끝이 아리게 찡해졌다. '형우야 미안해'하는 사과가, '왜'를 묻던 한탄이, 혼자 바다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압력을 견디기 위해 참는 숨이 각각의 상처와 고통이었다.
" 어떤 날은 포항에서 하루, 어떤 날은 울진에서 반나절, 어떤 날은 강원도까지 올라가 며칠 머무는 식으로 멀리서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52"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어서, 피해야만 하는 곳이 있어서 형우는 길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트럭커라는 직업을 봤을때, 오래 전 한 트럭커 부부의 생활을 본 것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장거리 운송을 하는 부부의 이야기였는데, 그 영상을 보고 언젠가 더이상 한국에 머물 끈이 없어지고나면 미국에 가서 장거리 화물 운송을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가 없어지면 길 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런 삶은 도망치는 것일까 찾아 헤매이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여름이 끈질기고 길게 지나가고 나면 '물방울(119)'부터 낯선 이야기로 들어가는 전환이 일어난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듯한 구와의 만남은 천진하면서 새롭다. 깊은 물 속에서는 사방이 다 똑같이 느껴져서 영영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29)는 말이 다시 들려오는 듯 했다. 이 기묘한 만남을 따라가다보면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감각을 잃어버린 채 기억 속에 갇혀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이 깔린 채 일구와 이구의 시간으로 따라간다.
삼구(형우)의 여정은 결말이 정해진 불안과 불편 위에서도 파핑캔디의 조각처럼 터져나오는 생의 순간들을 되새겨준다. 잊고 있던 어느 날의 기억들이 돌아올 때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순간들을 정성껏 들여다보던 삼구의 마음을 헤아리다 부러워했다.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오히려 갇혀있던 기억의 해방 앞으로 삼구를 데려다 놓는다. 기어코 열려버린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고통과 상처였다. 불안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 순간, 십년동안 멈춰있던 형우의 시간과 가족의 공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형우의 상자 가장 밑바닥에 남은 것은 회복이었다.
이 과정을 쫓으며 '말라가의 밤'은 겨울과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언뜻 여름밤을 떠올리는 표지와 따뜻한 계절일 먼 이국의 지명인 말라가를 더듬어보다 형우가 39가 되어 만나게 되는 숫자들을 통해 스크루지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을 떠올렸다. 스크루지에게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했다면 형우에겐 존재의 회복이 필요했다. 형우를 부수고 고립시키며 사라져버린 가족들로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생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형우는 39가 된다. 첫번째 9에서 하나씩 다음 9로 이어지는 동안 시간에 가려지고 잊힌 기억들이 되살아나 39는 다시 형우가 된다.
"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절대 혼자서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버디와 함께할 것. 332"
올해가 가기 전에 다 털어내지 못한 기억이 남아있다면 '말라가의 밤'과 함께 회복하는 호흡을 나눠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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