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테일 2025/10/0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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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하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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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컴버는 멀고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가 사랑과 존중을 무한정 누리는 곳, 내가 꿈꾸는 곳. 나는 커컴버를 꿈꾸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도착하기도 전에 추방당했다. 107"
책을 읽다가 문득 거실 한쪽에서 조용히 자기 집에 들어가 대기중인 로봇청소기를 흘끔 거렸다. 쟤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익히고 가끔 발생하는 장애물들을 피해 이리저리 열심히 청소를 하는 것만 봐도 대견한데, 프로그래밍 된 몇가지 짧은 문장 외에 말을 한다면 어떨까. 집안일을 해주는 로봇이 나에게 말을 건네온다면, 기특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 사실 밥솥이 띠리링 울리며 밥을 한다고 말하는 소리도 가끔은 너무 말이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보다 더 수다스러운 사물의 수다를 참아줄 수 있을까. 처음엔 아미쿠의 말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말을 하는 대신 조용한 연주곡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면 좋을텐데, 미리내가 아미쿠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온 집안을 기름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숨기고 있었던 비밀을 밝혀내는 집안일 로봇은 반품이나 교환을 유발하긴 할테다.
학교에서 도로시의 소설을 쓰는 것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미리내는 자신이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정말 모든 것을 직접 썼냐는 질문이 그의 양심을 찌른 것이다. 인공지능의 첨삭 도움을 받은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우리의 창작 활동이 앞으로 어떤 영역으로 더 변화해나갈지 모르는 일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도 선뜻 미리내를 두둔해주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가 유치함에서 흥미로움으로 넘어가는 요소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인공지능과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창작을 생산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지점을 자연스럽게 내용에 녹여내 소설에서 현실로 생각을 확장해준다.
미리내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름 대신 채소의 이름을 붙인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흐려서 구석에 밀어두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남까지 지워버리는 태도,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날서고 공격적인 모습은 미리내에게서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미리내가 가장 감정을 크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미쿠와 관련이 있을 때 였다. 아미쿠 외의 사람들과는 불평이나 비꼬는 말, 욕설, 단절을 담은 대화를 한다. 아미쿠에게 자신의 부끄러움과 분노를 대신해서 폭발 시켰을 때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미리내는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누구도 미리내를 들여다봐주지 않는데 오직 로봇만이 계속해서 그를 두드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같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미리내."(39,112)" 다른 누구도 해주지 않는 것을 기계만이 해주는 미리내의 세계를 떠올려보면 그의 가시가 왜 날카롭고 거센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오직 로봇만이 단절된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에 끝까지 기회를 요청하고, 사람은 왜 서로가 단절되었는지도 모른채 로봇에게 기댈지도 모른다.
" 강미리내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투명 인간이어도 상관없지만, 작가 도로시만큼은 사람들에게 주목과 찬사를 받으면 좋겠다. 강미리내는 어둠 속 그림자처럼 희미해도 되고 아예 안 보여도 그만이다. 하지만 도로시만큼은 해처럼 환하고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한다. 20'
그러다 문득 미리내에게 아미쿠가 진짜 있는 것일까 의심도 들었다. 다가오는 파프리카를 끝내 밀어낸 미리내의 모습, 함께 쫄면을 넣은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진짜 사람인 친구가 결국 그렇게 멀어져가는데도 미리내는 아미쿠의 음성에 기댄다. 망가진듯 보이는 모듈이 정말 다시 작동하는 것이 맞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녀의 첫번째 독자를 지켜낸 미리내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진짜 자신은 밀어내고 작가 도로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어차피 마음에 들지도 않는 강미리내 따위는 저만치 밀쳐 두고, 존재 의미는 작가 도로시의 정체성에서 찾(51)"기 위해서, 어떤 세상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는 도로시의 권능으로 도로시를 위한 아미쿠가 있는 세상에 빛을 주기로 한 선택같이 느껴져 씁쓸함이 남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분명 함께 꿈과 우정을 키워나가는 두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독서등 불이 미치지 않는 거실 구석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남았다. 거기에 로봇청소기가 있었다. 언젠가 그게 내 유일한 친구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차게 식었다.
다시 청소년도서를 읽은 만큼 밝고 따뜻한 것들로 눈을 돌린다. 당근맨이 보냈다는 무만한 당근 상자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인공지능 로봇이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도 여전히 제주도에서 당근은 나는구나,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상한 곳에서 안심이 되었다. 표지에 그려진 아미쿠의 관절이 너무나 구태의연해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를 다소 유치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으로 바라볼지도 모르는 예비 독자들에게, 이 안에서 음미할 아릿한 쇠맛에 대해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휴에도 소설 모드를 유지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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