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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님의 서재
  • 미세공격 주의보
  • 남대희
  • 16,200원 (10%900)
  • 2025-04-10
  • : 2,320
벌써 나온지 10년이 되어가는 영화 검사외전(2016)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선배님, 저 휘문고 95기입니다."
"어 그래? 이거 직속이네? 담임 선생님이 누구?"
"독..사..?"
"아! 그 양반 아직?"
사기꾼인 강동원이 박성웅에게 접근하기 위해 학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독설로 유명한 한 방송인은 같은 지역 출신임을 밝히는 후배 연예인들에게는 유독 너그러운 반응을 해주기로 소문 나있다. '미세공격 주의보'는 그저 재미있는 일화에 지나지 않을 이 모습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낙인과 경계가 됨을 환기시키고 있다. 
"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와 민족주의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다양성이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담론은 그동안 불필요했고 따라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도 없었다. 한국인은 유독 같은 고향이나 학교 출신 간 유대감이 크다. 워낙 공동체 문화에 익숙하여 뭐 하나라도 공통점이 있으면 쉽게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끼리끼리 뭉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p51"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크게 공감했던 것은 "회사가 직원을 우습게 안다(191)"의 내용이었다. 일하던 직장에서 선임이, 또 내가 후임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굵직한 조언은 '너 아니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였었다. 업무 흐름에 익숙해지고 책임이 생길 때 쯤 이 일을 내가 꼭 처리해야할 것 같고, 나 아니면 수습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단 생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전에도 후에도 누군가가 어떻게든 진행되도록 굴려왔다. 나 아니면 안될 것 같아도 사실 다 되고 그런 의욕을 회사가 알아주지 않으니 적당히 하라는 조언이었다. 언뜻 노력하려는 다른 직원의 힘까지 빼버리는 방해같겠지만, 나중에 번아웃이 오고 상처받지 말라는 예방주사였다. " 회사가 직원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최악의 미세공격이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뭔가를 결정해 내놓을 때, 직원들이 당연히 알 권리가 있는 사안인데도 투명한 설명 없이 침묵할 때, 누가 봐도 경영 위기인데 경영진의 설명이나 비전 제시가 없을 때, 회사가 직원들에게 줬던 것을 뺏을 때, 조직이 직원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직원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을 일언반구 없이 무시할 때, 회사가 수시로 주요 의사결정을 바꾸고 문제를 외면하며 고치려 들지 않을 때 직원들은 한없이 절망한다. p191"  

이직, 출산휴가 등으로 비워진 인력 공백을 충원없이 남은 인원들에게 떠넘기고, 직원 복지차원에서 배정되었던 비용을 삭감하고, 휴가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직원 면담을 핑계로 다른 직원에 대한 업무와 태도를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일들을 겪으며 살아남은 직원들의 생존전략이나 다름 없었다. 이 과정을 못 버티고 조용히 사라진 동료들의 빈자리를 채운 신입에게 우리는 지치면 교체해버리고 마는 부품이나 다름 없으니 의욕과 노력을 보이는 대신 천천히 지치라는 냉담한 조언은 미세공격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동료 직원들끼리 미세공격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곤했다. 한참 의욕이 생기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입장에서 당신 아니어도 그 업무를 대체할 사람은 많다는 말은 상처나 다름없다. 이미 줄어든 혜택과 과중된 업무를 계약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선임자들이 빼앗겨 싸운 복지는 사내 분위기만 흐리는 불만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직원들간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고 이는 더 많은 이탈자들을 만들었다.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땅히 남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처럼 서로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사회 생활이 원래 이렇다는 말을 끌어다 핑계삼았다. 

흔한 갈등이다. 개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배울 때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교류하며 역할을 갖는다. 개인은 학생이거나 직장인이면서 누군가의 가족이고, 취미 모임의 일원일 수도 있다. "차별과 미세공격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기에(173)"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부여되는 단체성이 수시로 우리를 피해자와 가해자 위치에 둔다. 누구도 무결할 수는 없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내가 받은 미세공격을 떠올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남에게 어떤 시선과 잣대를 내밀어 공격을 했었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편견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발견해야 한다...중략...일반 버스나 콜택시를 타면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220)"는 내용은 확실한 의식의 전환이 된다. 책에서는 '4부 미세공격을 대하는 자세'를 통해 조직에서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방향을 제시해주며 내용을 마무리 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더 넓은 범위로 시선이 옮겨감을 느낀다. 

책을 다 읽은 날 곧 개봉을 앞둔 영화 '해피엔드(2024)'를 먼저 관람하게 되었다. AI 감시 카메라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내용도 문제적이지만, 그보다 더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선명하게 그어진 차별의 장면들었다. 경찰의 검문을 받을 때마다 재일한국인인 고등학생 코우는 4대를 거쳐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집까지 임의동행하여 신분을 증명해야만 한다. 코우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 규정되지 않은 다문화 학생들은 학교에서 마련된 자위대 강연 시간에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교실에서 쫓겨나게 된다. 영화가 시작될 때 '이것은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이런 일이 실제로 트럼프 정권 아래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휴스턴대학 한국인 조교수의 비자와 컬럼비아대 유학생들의 비자가 명확한 이유없이 연달아 취소되는 일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더불어 지난 4월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사회보장청이 불법 이민자 추방과 사회보장 혜택 박탈을 위해 6천명이 넘는 생존 이민자들의 이름과 사회보장번호를 연방정부의 사망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직장 내의 미세공격 주의보 넘어 국제 사회의 확연한 위협으로 파시즘이 끓어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나 자신은 정말 편견 없이 사는가?(221)" 질문해야 할 때다. "스스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루를 마칠 때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는지를 돌아본다면 그만큼 편견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질 것이다." 처음엔 이런 자기 반성과 점검을 피곤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엔 '피곤하다'는 핑계로 가진 것들을 휘두르려고 했던 이기심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구역'을 만들었다. 아이들이나 노인같은 특정 나이대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차별하는 구역을 만들어냈다. 거주지와 소득으로 타인을 멸칭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피부색과 국적으로 선입견을 갖는 편견도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학교, 상점, 회사, 동네, 지역 범위를 넓혀 국가간의 갈등으로 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뉴스를 볼 때면 그저 세상의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는데 '미세공격 주의보'를 읽으며 일부만의 문제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미세공격 주의보' 덕분에 우리 안의 차별과 특권의식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시민 의식과 문화를 구축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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