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테일 2025/04/1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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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신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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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2025-04-01
: 8,560
연쇄살식마인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은 사실 수년전에 먹었지만 그 와중에도 식물을 주겠다는 사람이나, 버려질 위기에 처한 식물을 데려오는 등 몇번의 연이 있어서 들였으나 작년 봄 즈음해서 꽤 오래 간신히 살려두었던 식물들과도 작별하고 정말 이제 더는 집안에 살아있는 식물은 없다. 길가다 보는 예쁜 꽃들만 예쁘다,하고 즐길 뿐이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기 시작했다. 식덕인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면 식물은 꺾어도 의지는 꺾이지 않는 애정과 노력이 보인다. 더불어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그려낸 섬세하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고 있자면 매혹된다. 갑자기 식물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책 안에서는 나는 종종 당황스러웠다. 나에겐 지나치게 감성적인 시선이 어색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명 어딘가 상처받고 치유를 위해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전해진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일년간 외국의 연구소에 머물면서 지독한 향수에 고생했던 얘기도 감정적 교류와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구나 싶었다. 가장 멀게 다가왔던 것은 눈 내린 풍경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부분이었다. " 도시에 살 때 사람들이 눈 덮인 풍경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건 비겁한 풍경이라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눈 밑에 그대로 있으니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껍게 쌓인 눈을 뚫고 뾰족뾰족 튀어나와 있는 풀잎들을 발견했을 땐 '거봐, 어떤 건 절대 덮을 수 없어'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p23"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감싸 더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편이라 사람들은 정말 다 다른 생각을 품고 사는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 덮인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비슷한 시선으로 " 지금 이 순간에도 원예품종은 개발되고 있다. 우리가 꽃 가게에서 마주치는 난초 대부분이 그렇다. 난초뿐만이 아니라 판매되는 대다수 꽃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꽃집에서 꽃을 사서 그리길 꺼린다. 원예품종은 야생식물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식물학자에게 식물종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p45" 는 문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런 구분에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좀 냉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문득 얼마 전 길을 걷다 구경한 펫샵이 생각났다. 판매를 위해 개량되고 강제로 교배되어 더 귀엽고 유행하는 어린 개체를 만들어내는 시장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동물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이 산업에 반대한다. 태어난 어린 동물들도, 개발되어 피어난 원예품종들도 아무 잘못이 없이 참 보기 좋고 귀하지만 그 과정과 목적에서 본질을 찾게 되는 것은 저자도 그 자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구나 이해되었다.
이해가 되니 조금씩 이야기가 전달됐다. 살구를 좋아한다(105)는 공통점도 발견하고, 추수감사절 칠면조 요리를 맘에 들어하는 점(196),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 대한 시선(193)도 비슷했다. 처음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면의 괴로움은 계절이 다 한 인연들을 정리하면서 비롯된 것(206)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헤어져야 함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건 나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상대방을 탓하기 쉽지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는 없다. 사랑했지만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무심하다고 느껴 상처받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상처를 주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런 만남이라면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헤어져야 한다. 건강한 만남도 소중하지만 건강한 헤어짐도 소중하다. p208" 이런 맺음에 이르기까지 속안에 가득 찬 것들을 덜어내 비우고 정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먹먹했다.
책을 읽다보니 나무는 잘 죽지 않아 나무를 죽이는 방법을 소개(64)하기도 한다는데, 지난 산불로 그렇게 잘 죽지 않을 나무들이 너무나 많이 불에 타버렸음이 생각나 더욱 안타까웠다. 사실 그 전부터 차를 타고 다른 지역을 다녀올 때 산에 죽은 나무들이 눈에 띌 때가 전보다 늘어난 것 같아 환경 문제 때문일까 혼자 염려했었다. 얼마 전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이라는 나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도로 확장이나 재건축 등을 이유로 가로수들을 다 베어버려 아쉬웠단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잘 죽지 않아 죽이는 것 조차 오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자연 환경이 결국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쉽게 파괴되는 것이 씁쓸했다. 제왕나비를 위해 감자 몇 알 대신 밀크위드의 덤불을 남겨두는 것처럼(183) 위태로운 자연을 위해 우리의 욕심에서 항상 뭔가를 더 남기고 비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덕분에 요즘처럼 벚꽃이 만개하여 잔바람에도 빗방울에도 금방 떨어져내리는 꽃잎이 너무 성급한 것 같아 아쉬울 때면, '화려한 꽃잎들이 떨어져 꽃이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무엔 어린 열매들이 남겨져 있다고. p60' 떠올릴 수 있어서 기쁘다. 책의 내용만큼이나 그림이 예뻐서 볼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림이 더 많았어도 좋았겠다. 사실 그림과 짧은 이야기를 엮은 컬러링북을 내셔도 좋을 것 같단 사심이 생겼다. 청초한 표지도 참 마음에 들어서 더는 식물을 들여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탓에 심심해진 책장에 화분 대신 책의 표지가 잘 보이도록 놓아두기로 했다. 저자가 식물학자이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이렇듯 섬세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어서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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