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p18)"
조금 성급할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볕은 이미 여름이었다. 최지은 작가의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 표지를 보면서 마냥 싱그러운 여름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수박, 수영장, 아이스크림, 친구들, 매미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을.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탓에 나뭇잎에 조금씩 박혀 빛나는 표지의 홀로그램을 일부러 이리저리 돌려보며 표지만 며칠을 봤다. 바람이 시원하고 커피가 맛있는 날, 좋아하는 간식을 옆에 두고 마치 피서처럼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었다.
세상에, 첫 이야기를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자란 아이' 경력 때문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간 모든 것들에 조금씩 약하다. 게다가 요즘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 때문인지 전보다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 눈물도 많아졌다. 다시 책을 펼쳐 읽으려니 마음이 괴로워 고통스러워 화가 났다.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다가 그냥 잠이나 자버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악몽을 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 부채, 의심, 불안, 불만, 두려움같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꿈이었다. 그것들이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에 깨고나서도 괴로운 꿈이었다.
" 망가질까봐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가뜨리고, 무엇을 수선하고, 무엇을 다시 세우고, 무엇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알 것 같기 때문이다. (p75)"
복잡한 속마음을 그대로 아는 것처럼 느리게 집어든 책에서 눈에 띈 문장이다. 내가 나에게 매몰되어 있던 동안 피하고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타인과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렇게 성숙하고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닐 수 있을까. 관계가 망가지고 나면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언제쯤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잘 고르고 고른 글들로 솔직하게 쓴 에세이인데 읽는 나에게 준비가 필요했던 책이다.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보다 애틋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더 보기 어렵다. 가끔 인터넷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인줄 알고 봤다가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만화가 있다. '틴틴팅클'이라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만화인데,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으면서 인물의 배경이 같지는 않지만 할머니와 애틋한 '콩물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틴틴이나 팅클이의 이야기보다 콩물이의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는데, 같은 시선으로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조금은 가볍게 나의 여름을 하나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 당신의 여름 과일이 궁금합니다 (p113)" 를 통해서 떠오른 일이다. 오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오이맛이 나는 과일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달거나 맛이 진하지 않은 과일 종류들이라고 해야될까. 참외나 수박, 토마토 같은 것들을 오래도록 먹지 않았는데 이들이 주로 여름을 대표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나에겐 여름 과일이 없었다. 여름에 남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모임 자리에 갔을 때 과일을 대접해온다면 늘 눈치를 보게 됐었다.
그동안 편식이 심한 사람, 신기한 사람, 철이 덜 든 사람 보듯한 시선과 이건 진짜 맛있으니까 한번만 먹어보라고 억지로 권하는 사람들을 애써 차단하느라 여름과 과일이 더 싫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을 위해 일부러 토마토를 먹는 연습을 해오면서 작년엔 수박도 연습을 시작해 이제 토마토와 수박을 먹는데 성공했다. 남들이 보면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가 싶을 이야기지만 싫어하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서 얻어낸 성과라 매번 뿌듯하고 먹을때마다 새롭다. 그리고 여름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이해의 폭이 늘어나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기분이다.
제멋대로 내 삶을 이어붙여가며 책을 읽은 탓에 "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신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긴 산책을 이어가야 했다. 첫 시집을 읽은 몇몇 독자들의 리뷰를 읽으며 마음이 쿵, 내려앉을 때도 있었다. (p167)" 는 부분을 읽으며 제풀에 찔리기도 했다. 처음 읽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고 했던 말들이 저자의 마음을 쿵, 내려앉히지 않길 바라면서 올해의 뜨거운 여름은 선명하고 싱그럽게 지나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