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대략적인 내용 참고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2358.html
* 전반적인 이 책의 느낌은 ★충격적★이라는 것?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충격을 받은 책은 오랜만인 것 같다. 지적 파문을 일으키는 책. ‘급진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 우리가 생각하는 신념은 얼마만큼 견고할까? 사실 그런 신념은 거의 없다. 실제 우리가 오감을 통해 느끼거나 우리의 머리로 인과관계를 고민하기보다, 전문가의 간접경험을 통해 결론을 주입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동안 내가 가졌던 교육 신념이 랑시에르의 이 책을 본 이후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랑시에르는 역사속의 실제인물인 조제프 자코토(1770~1840)의 행적이 설득력을 더한다.
* 구식을 통한 가르침(설명자의 지능을 다른 지능과 연결해 예속하는 방식)은 어쩔 수 없이 가르치는 자와 무식한 자로 나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런 이분법은 무식한 자를 위축시키며 가르치는 스승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바보만들기라고 일컫는다. 소크라테스의 산파법마저도 이런 구식이라고 얘기한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무지한 스승의 지적해방이란, 스승 자신이 전문 지식을 몰라도, 학생을 지식적으로 예속하지 않으면 학생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생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강제란 아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승의 권위를 바탕으로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능적인 학습의 결과에 대해서는 학생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되, 학생의 의지는 스승의 강제를 통해서 적극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 교육학자 타일러는 학습목표를 중시했으며, 그런 학습목표는 지식의 위계 등을 고려하여 짜임새있게 구성해야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른 학습평가는 그런 학습 목표의 완수 정도를 따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교육과정은 현대 교육과정 커리큘럼에 그대로 나타나며 한국도 다르지 않다. 이런 타일러의 교육과정을 비판하여 ‘재개념주의’가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파이나의 자서전적 교육과정 개발 모형이다.
파이나도 타일러를 비판했지만 랑시에르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파이나는 어디까지나 교육과정 개발 ‘모형’이었기 때문에, 교사 또는 교육과정 기획자가 그려놓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자서전적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달리 보면 랑시에르와 정도의 차이일뿐 방향은 같은 방향같다. 랑시에르가 여기서 자세한 기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랑시에르의 주장은 다분히 신비적이다.
* 우선 랑시에르가 말하는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 실현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할 필요를 느낀다. 그렇지만 학교현장에서 실험을 시도하기도 힘들다. 우선 무지해야한다. 이건 사실 제일 쉬울수도 있다. 둘째로 교육학자 타일러가 주장했던 학습목표에 맞춘 학습평가는 전혀 시도할 수 없다. 한국교육과정은 타일러가 주장한대로 학습목표에 맞춰 학습평가를 해야한다. 그렇다면 수업은 당연히 여기에 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주장대로 한다면 학생의 지적해방을 위해 학습목표- 수업- 학습평가의 구조로 어떤 지식 습득을 위해 유도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학교현장에서 실험하기에도 참 곤란하다. 특히 입시제도, 수능 등에 예속되어 있는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서는 더욱 곤란하다. 굳이 가능할 법한 곳을 찾자면, 방과후 교육활동(입시에 얽매이지 않은!)이나 클럽활동, 창의적 재량활동 등이며, 대안학교, 공부방활동, 야학 등도 있을 수 있겠다.
* 랑시에르의 ‘의지’가 가장 큰 논란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등한 지능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현실에 보여준 많은 불평등한 차이는 의지의 차이로 책임을 지운다. 그래서 무지한 스승이 그래도 스승인 이유는 학생의 의지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력도 실력아닌가? 다분히 역설적일 수도 있는 이 말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의지야말로 선천적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랑시에르는 얘기를 하지만, 노력과 그 원동력인 의지도 (노력과 의지를 같은 것으로 보겠다) 선천적인 실력과 같이 개인만의 편차가 있고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지를 표현하는 원인이 선천적인 DNA에 있는 것이라면..? 군대에서 아무리 강한 규율로 반듯한 군바리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실상 차이가 크다. 이런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는 의지와 지능의 개념혼란이기 때문에 정확한 정의를 통한 분류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비판 지점도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메모를 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선천적으로 기억이 좋은 다른 사람에 비교해보면 많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도 랑시에르가 말했던 의지의 문제인가? 지능문제 아닌가? 아님 집중력 문제일까? 집중력 문제라면 그것은 의지일까 지능일까? 랑시에르는 지능은 동일한데, 의지의 문제로 결과의 차이를 발생시킨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선천적인 지능의 차이로 인해 결과의 차이가 발생한다면?
* 이 책이 주장하는 ‘무지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정작 저자 그 자신은 이 내용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무지한 스승처럼 가르치기 위해선 책이란 해석 여지가 큰 시(詩)의 형식으로 변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은 지나치게 분명하게 비판하고 도식적이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막대 구부리기’로 이해해야 하는가?(막대 구부리기는 레닌이 즐겨 쓰던 표현인데, 구부러진 막대를 똑 바로 펴기 위해서는 반대로 휘어질 만큼 힘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 똑바로 펴기위해서 =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 반대로 휘어질만큼 힘을 줘야한다 =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인 힘을 줘야한다. ) 즉, 당장 조금이라도 납득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는가?
* 랑시에르와 자코토의 ‘보편적 가르침’은 언어에만 주로 적용될 수 있을 듯 하다. 즉, 언어 이외에 이 가르침이 보편적이기에는 힘들 듯 하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촘스키는 “모든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언어 습득 능력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딱 거기까지만 적용되지 않을까.
* 아방가르드 (avant-garde: 전위대) 를 비판하는 아방가르드 랑시에르
- 그는 계몽주의의 기반위에 이성의 힘을 빌어 진보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아방가르드를 철저히 타파하여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아방가르드이다. (아방가르드는 두가지 뜻이 혼재되어 쓰이고 있다. 하나는 19세기초에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정당과 당원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다른 하나는 19세기 중반부터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지금까지의 예술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예술경향이나 그 운동을 뜻하는 용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술사조로 엘리트 예술을 비판하는 다다이즘이 있다)
-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공교육 시스템을 기획했던 계몽주의자마저도 랑시에르는 비판한다. 목적은 진보적일지 몰라도 방식은 구식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