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세 부류로 나눈다. 이탈리아어로는 이를 ‘아테오’(ateo)와 ‘크레덴테’(credente), ‘라이코’(laico)라고 부르는데, ‘아테오’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를 가리킨다. ‘크레덴테’는 신앙을 가진 자인데, 특히 ‘프라티칸테’(praticante)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교리를 충실히 시키고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이코’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종교가 관여하는 분야와 관여해서는 안 되는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라이코’,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은 갈릴레오도 ‘라이코’였다.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학혁명을 이끈 이들은 모두 ‘라이코’들이라고 해도 좋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2003년에 마침내 인간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혀낸 미국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S. 콜린스(Francis S. Collins)의 저서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는 가히 ‘라이코 자아 선언서’라고 불릴 만하다. 우선 그는 과학을 앞세워 신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종교와 신앙의 가치를 무참히 깎아내리는 ‘아테오’, 이른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프랜시스는 특히 무신론의 주장이 증명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하면서, 과학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자연을 초월한 신에 대해서는 과학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비이성적 태도이며 이는 맹목적인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꼬집는다. 극렬한 ‘아테오’는 극렬한 ‘크레덴테’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의미로 신앙을 해석한 나머지 모든 과학적 진보를 거부하려는 ‘크레덴테’ 즉 창조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큰 우려를 표명한다. 수많은 과학적 증거를 애써 외면하면서 비논리적인 자연관을 고수하는 것은 신앙의 존립기반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지적 파멸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태도임을 애써 강조하면서, 과학 지식이 곧 신의 창조 원리임을 자각하고 새로운 과학적 사실의 발견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신앙인들에게 주문하였다. 그리고 ‘아테오’와 ‘크레덴테’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둘 사이의 왜곡된 교잡물이라 할 수 있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ID)’도 프랜시스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지적설계론은 현재의 과학수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신의 섭리로 메우려는 실망스런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하며, 신의 섭리로 메워진 부분이 새로운 과학적 지식으로 대체될 경우 신앙에 심각한 해를 입힌다는 점을 언급한다.
신앙과 과학 사이의 이러한 불협화음을 조정하고자 저자는 ‘유신론적 진화’, 이른바 바이오로고스(BioLogos)라고 불리우는 신앙과 과학의 새로운 조화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는 우주론과 진화론 등 현대 과학이 이루어 놓은 이성적 지식체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한편으로, 세계 각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도덕법과 종교현상을 근거로 영적 본성과 영적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취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물론 저자의 초기적 발상과 가설에 불과한 개념이지만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되 그 둘을 조화롭게 안고가려는 ‘라이코’적인 사고방식과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백미(白眉)는 저자가 추상적이고 해묵은 이분법적 유무신론 사고에서 벗어나 마침내 실존(實存)을 자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바로 나이지리아 선교의료 봉사에서 자신이 치료한 어느 농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다. “제가 보니까 선생님은 지금 내가 대체 여기를 왜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선생님이 여기 오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저를 위해 오신 거예요.”
보행자 증발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마주 오는 두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 사이에 있는 보행자 모습은 운전자의 육안으로는 잘 안보이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과학과 종교, 무신론과 유신론, 이성과 신앙이라는 전조등 불빛이 서로 마주보며 밝아질수록 그 사이에 놓인 구체적 인간의 실존은 더욱 흐릿해지게 된다. 인간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 도리어 인간보다 상위에 군림하여 삶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추상적인 의미와 상호 대립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이 치료한 농부 한사람의 실존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헤매다가 그의 심중을 눈치 챈 그 농부로부터 통쾌하게 한방을 먹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대체 무엇을 위한 논쟁이었던가? 신이 있느냐 없느냐, 과학과 신앙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느냐 따위를 놓고 수천수만 번의 논쟁을 거듭한들 한사람의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실존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비로소 그 실존에 숨어있는 신의 자취를 감지하고 신의 존재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가 느끼기에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과학에도 없었고, 종교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사각지대에서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전(全)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에 내재해 있었다. 또한 그렇기에 프랜시스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과 조화에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진정한 ‘라이코’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편, 이 책의 말미에는 생명윤리학의 문제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 부록이 본문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체세포핵치환 등 최신 생명공학기술들의 장단점과 윤리적 쟁점을 다루었는데 저자가 윤리적 논란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체세포핵치환 기술에 주목하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또한 맞춤형 의학과 유전자 정보 제공과 관련된 윤리적, 제도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과학자와 의학자 위주로 구성된 전문가 독주 현상을 경계하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다양한 견해를 서로 경청하며 나눌 것을 권고하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어설픈 ‘아테오’와 ‘크레덴테’에서 벗어나 건전한 ‘라이코’로서 거듭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마주보는 두 전조등의 조도를 낮추어 그 사이에 놓인 보행자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게 된다면 우리 인류는 새로운 ‘라이코’ 두 사람을 얻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