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화는 무엇일까? 창조신화? 홍수신화? 인간 기원신화? 인류 최고(最古)의 수메르 문명을 비롯하여 이후의 아카드, 바빌론 등 고대 근동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들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에 근거하면 가장 최초로 문헌적 구성을 갖춘 신화는 ‘신이 저승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이야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메르의 인안나(바빌론의 이슈타르)여신과 그녀의 남편인 두무지(바빌론의 탐무즈)의 저승 하강과 복귀 신화다. 이들이 저승으로 내려가 신전을 비우면, 지상에서는 재해와 기근, 전쟁과 같은 고통이 인간들에게 밀어닥친다. 그러나 신들이 지상으로 돌아오면 다시금 풍요와 번영이 시작된다. 고대 근동인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세상과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실존적 고통(주기적 기근, 역병, 자연재해, 전쟁, 계절변화 등)과 그로부터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들이 ‘왜’ 저승에 내려가며, ‘어떤 이유’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그 어떤 문헌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들의 노역을 대신 떠맡기 위해 창조된 하급의 피조물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제넘게 자신의 신이 왜 신전을 떠나 저승으로 내려가고, 왜 다시 돌아오는지를 함부로 알려 해서는 안 되었다. 인간의 대표자인 왕만이 신탁을 통해 그 내막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을 뿐,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제의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신이 저승으로 내려가 지상에 재난과 고통이 만연하면 그의 조속한 귀환을 열심히 빌어야 하고, 지상에 다시 올라오면 열렬하게 감사와 찬양의 제의를 드리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역사 이래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학적 의문은 이렇게 제의와 신화 속에 가려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신 야훼는 인근 주변 민족들의 신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이 왜 백성으로부터 떠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돌아오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묻고 따졌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 구약학 교수인 클라우스 코흐는 자신의 저서『예언자들(The Prophets)』에서 바로 이 ‘철저하게 묻고 따짐’의 역사적, 신학적 전개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주요 주제가 이스라엘의 예언과 예언자라는 점에서는 조셉 블레킨솝의『이스라엘 예언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블레킨솝이 예언의 시대적 배경과 맥락의 흐름에 중심을 둔 것과 달리, 코흐는 예언자 개개인의 사상적 특성과 신학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아시아 한자(漢字) 문화권의 저술 방식에 빚대어 표현하자면, 블레킨솝의 저서는 일종의 편년체(編年體)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코흐의 경우는 열전(列傳)의 형식을 빌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자 열전’을 통하여 코흐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당대 근동 문명에서 금기시된 신학적 의문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독특한 윤리적․도덕적 신관(神觀)으로 확장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예언자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백성들로부터 등을 돌려 떠나고, 백성들이 혹독한 재앙을 맞는 것은 백성들 스스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저버려,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뿌리부터 썩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금수(禽獸)의 본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정착할 땅을 확보하여 그곳에서 공동체와 사회 제도를 만들고, 사회 구성원간의 합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야훼로부터 땅을 받았고, 그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방법들까지 부여받았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땅을 동족끼리 강탈하고, 그 땅에서 온갖 부조리와 악덕들을 자행하면서 이스라엘의 사회는 근저부터 죄에 오염되고 말았다. 그렇게 만연한 사회의 악(惡)은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인 제의까지 더럽힌다. 제의를 더럽힌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힘을 당한 신은 당연히 백성들을 떠난다. 백성들을 지켜주는 신이 떠난다는 것은 곧 그 백성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이다. 신의 떠남은 곧 심판이요, 진노일 수밖에 없다. 되돌릴 수 없다.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예언자들은 떠나가 버린 하느님이 다시 돌아온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백성들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기 시작했다. 포로기의 예언자들에게 신의 떠남은 곧 돌아오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회복에는 정화의 아픔이 따른다. 타락한 사회 정의를 복구해야 했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제의를 다시 정돈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통찰하고, 개개인 하나하나가 하느님과 윤리/도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예언자들은 사변적이고 어려운 신학을 결코 대중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조상들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땅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고 그 땅에서 사회 정의를 다시 실현하면 된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타락이 쌓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오염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회개와 신의가 모이면 민족 전체가 살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은 인간 역사 속에 숨겨진 하느님만의 초월적 역사, 곧 메타 역사를 발견하고, 모든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신이자 창조주로서의 야훼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주변 민족의 신화에서 기원했던 물음에 대해 히브리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학적 체험으로 응답한 것이다.
왜 신은 떠나는가? 그것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잊고 불의와 타락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왜 신은 돌아오는가? 그것은 인간이 다시 신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떠남과 귀환, 다시 말해 심판과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의 태도에 달려있다. 하느님이 떠나고 없더라도 인간은 하느님과의 약속과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이 진노를 거두어 돌아오고, 고통의 시간이 줄어든다. 하느님이 민족에게 돌아왔더라도 약속과 정의를 실행하는 데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지속되고, 현세 역사의 번영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750년경부터 500년까지 활동했던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생각했던 인간, 그리고 20세기 코흐가 ‘예언자 열전’을 통해 재해석하고자 했던 인간은 단순히 신들의 노동을 하청 받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적극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코흐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주변 민족들의 예언현상도 기원전 500년경을 전후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을 통해 윤리/도덕적 인간관과 유일신 신학, 묵시문학을 발전시켜 더 이상 예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주변 민족의 예언까지 사라졌던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심원의 중심부인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그 주변 원을 구성하는 이방 민족들에게도 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회복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