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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둥지
  • 이스라엘 예언사
  • 조셉 블렌킨솝
  • 14,250원 (5%430)
  • 1992-12-01
  • : 73

말(言)에는 참으로 미묘한 힘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말은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평생 동안 삶을 괴롭힌다. 반대로 깊은 사랑 안에서 소망을 일깨워 주는 말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 이것은 말이 곧 ‘의미’이며 의미는 ‘뜻’과 통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뜻이 생명이다. 삶의 뜻, 삶의 의미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삶이다. 삶의 뜻을 전혀 찾지 못하면 자살까지도 하는 것이 사람이고, 삶의 뜻에 부합하면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바치는 것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모여 이루는 집단인 민족이나 국가에도 말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말이 곧 ‘사상’이며 사상은 ‘희망’으로 통한다는 점이 다르다. 민족, 국가의 명운에는 희망이 생명이다. 희망이 없으면 역사의 위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희망을 갖지 못한 민족은 희망을 가진 민족을 당해낼 수 없다.

 

‘말’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희망을 발견하여 꿋꿋하게 이산(離散)의 역사를 인내하다 마침내 2천 년 만에 국가를 재건한 민족이 있다. 한때 히브리인이라고 불렸던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이 바로 그들인데, 특이하게도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말이 없다. 이들에게는 오직 신(神)의 말, 곧 야훼 하느님의 말씀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먼 옛날 어느 날에 히브리 민족 전체가 단체로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하루아침에 뚝딱 받아쓰기하여 얻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고대 근동 민족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도 신의 말씀을 신으로부터 전달받아 왕이나 회중에게 선포하는 임무, 즉 ‘예언(預言)’을 맡았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민족과는 달리 유독 히브리인들은 예언자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를 수집하고 자신들이 헤쳐 왔던 역사의 거울에 비추면서 그것을 오랜 기간 동안 다듬고 정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의 메시지들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하여 어렵고 어렵게 건져 올린 것이다. 따라서 유대 민족에게 ‘예언(預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예언을 모르면 그들의 사상과 희망은 물론이고 유대 민족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 수 없는 문제로도 연결된다.

 

앵커 바이블에 올라간 이사야서 주석으로 명성을 떨친 영국태생 구약학자 조셉 블레킨솝(Joseph Blekinsopp)은『이스라엘 예언사』(A History of Prophecy in Israel)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이 ‘예언서’의 역사가 아닌 ‘예언 그 자체’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본문이 후대의 첨가이고 어떤 구절이 예언자 본래의 메시지였는지를 따지는 것은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부수적인 문제다. 물론 역사 비평적인 방법으로 예언서의 편집과 최종 본문의 형성 과정을 충분하게 다루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언의 역사적 사회적 변화 과정과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의 진정한 의도는 특정 예언이 최초로 출현한 시대와 그 예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거나 수정을 시도한 시대의 국제, 정치, 사회, 종교적 맥락을 비교하여 이스라엘 예언의 의미와 범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언이 어째서 그토록 다난하고 변화무쌍한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제도 속에 성공적으로 녹아들고 그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레킨솝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국제, 정치, 사회적 상황의 흐름과 함께 예언 성격과 변화 과정을 예언서에 대한 역사 비평 방법에 기초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역사 초기(광야시대부터 사무엘 전후)에는 예언이 곧 생존투쟁(전쟁)의 ‘승리’와 ‘왕국의 건설’을 의미했다. 그러나 왕국의 분단과 사회질서의 문란, 이방제의의 만연, 대제국 아시리아의 출현으로 인해 특히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예언의 양상이 달라졌다. 이때부터는 예언이 전쟁승리가 아닌 ‘고발’과 ‘심판’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분기점은 역시 바빌론 유배였다. 이 유배를 계기로 이전 예언서에 심판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첨가하고, 예언과 제의를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을 ‘희망’의 메시지로 재해석하고 종교생활 속의 일부로 받아들여 바빌론 포로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데 활용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울러 예언자의 전통을 모세까지 소급시키고, 예언서의 내용을 신명기계 율법 정리에 반영하는 등 자신들의 기원과 역사의식을 새롭게 갱신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유배 귀환 후 페르시아 시대 초기부터 헬레니즘 시대에는 예언의 의미가 ‘종말론적 희망’으로 더욱 풍부하게 확장되었으며, 하느님의 자유와 구원의지는 때때로 예언자의 예언을 뒤집을 정도로 확고하다는 메시지가 요나서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지의 거시적 예언사를 읽고 나니, 문득 『신화와 인생』(원제: Joseph Campbell companion)이라는 책에 나온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여러분의 종교는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유대인이나 가톨릭 신자가 되는 법을 말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되는 법을 말하는가?’

 

블레킨솝의 책을 읽은 지금은 단언컨대 이스라엘의 예언은 인간이 되는 법을 말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여느 작은 민족의 전쟁승리를 선포하는 지역 예언에서 출발하여 모든 민족의 구원과 희망을 말하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마치 일차원적 생존투쟁에 급급했던 사람이 점차 의연한 자세로 희망을 기대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지니는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성장을 이끌어준 예언의 역사를 오랜 기간 경험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했고 그 예언을 그분의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그들 속에서 생활 곳곳과 유대교 전례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2013년경 미국의 정보기관이 주요국 정상들의 전화를 도청한 일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언뜻 도청은 ‘귀(耳)’가 저지르는 범죄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도청(盜聽)’이 무슨 뜻이던가? 남의 ‘말(言)’을 훔쳐 듣는다는 뜻 아니던가? 한 나라 정상의 말은 그 정상 개인에게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나라 전체의 ‘희망’일 수도 있다. 남의 나라 ‘뜻’과 ‘희망’을 몰래 훔쳐 듣는다는 것. 그것은 말에 대한 고약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은 곧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말을 사람의 말에 맡겨 전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말은 그 누구의 것이라도 인간이 함부로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 국경을 넘나들며 말이 무참하게 도난당하는 세태가 참으로 우려스럽다. 스스로의 말에 더욱 조심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더욱 귀히 여기는 풍조가 회복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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